마지막 타자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의 빗맞은 공이 유격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일본 열도는 깊은 침묵에 빠졌다. 14일(현지시간)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전에서 베네수엘라에 5대 8로 역전패한 일본 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WBC 4강 진출 실패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경기 직후 일본 대표팀 간판 스타 오타니는 "우승 외에는 실패"라며 "이런 방식으로 끝나 무척 유감"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일본 야구사에 뼈아픈 기록을 남긴 이번 패배와 별개로 그라운드 밖에서는 또 다른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중계권' 문제다. 일본 대표팀의 사상 첫 4강 진입 실패라는 충격도 충격이지만, 사실 이번 대회 기간 내내 일본에서는 중계권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국가대표 경기가 공중파에서 사라진 생소한 환경을 두고, 스포츠 중계의 공공성에 대한 논란이 대회 내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 WBC 일본 내 중계권은 일본 공중파가 아닌 미국의 OTT 넷플릭스가 차지했다. 일본 공중파인 TV 아사히와 TBS 등이 끝까지 경쟁에 나섰지만, 지상파의 자금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결국 중계권 확보를 단념했다. 판권 금액이 전 대회보다 5배 치솟은 약 150억엔(약 1400억원) 수준에 형성됐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민적 영웅 오타니의 활약을 보기 위해 팬들은 월정액을 내고 OTT에 가입해야만 했다. 넷플릭스는 이를 기회 삼아 가입 첫 달 498엔(약 4670원)이라는 파격적인 할인 플랜으로 공세를 펼쳤고, 실제 개막 직전 앱 다운로드 수가 전년 대비 4.8배 급증하는 등 강력한 신규 가입자 유입 효과를 거뒀다.
가입자 수는 늘었지만, 시청자들의 속내는 복잡했다. 수십 년간 당연했던 '공짜 야구'가 사라지고 생소한 시청 방식이 강요된 데 따른 당혹감이 컸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60대 이상의 절반이 이번 유료 중계를 "문제"라고 답한 것은 유료화에 대한 저항을 넘어, 생소한 시청 방식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애플리케이션 설치나 조작 등의 접근성 문제가 시니어 층이 넷플릭스를 기피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짚으며, 이번 사태가 마치 마이넘버카드와 건강보험증의 일체화 과정에서 겪은 혼란과 닮아있다고 분석했다. 매체 전문가인 나카야마 아츠오는 이를 두고 "일본인은 야구 시청을 전기나 수도와 같은 인프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목소리는 곧 보편적 시청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아사히신문의 간판 칼럼인 텐세이진고(天声人語)는 영국이 법률을 통해 국민적 행사에 대한 무료 방송을 의무화하고 있음을 소개하며, "스포츠는 누구의 것이며 시청자의 권리는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날카롭게 반문했다. 닛케이 역시 "'국민적 순간'을 창출하는 스포츠를 자본의 논리에만 맡겨둘 것인가"라며 스포츠의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공중파가 아닌 넷플릭스의 중계권 확보로 기이한 풍경도 연출됐다. 이번 대회 영상 제작은 공중파인 니혼테레비가 맡았다. 공중파가 OTT의 하청 역할을 맡은 셈이다. 이에 대해 니혼테레비 측은 제작 수탁 업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임하고 있다면서도 "지상파로서 직접 방송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며, 현재 상황이 이대로 좋은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토로했다. 중계권을 확보하지 못한 지상파의 씁쓸한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같은 중계권 문제는 거리의 응원 풍경까지 바꿔놓았다. 넷플릭스 이용 약관상 상업적 목적의 상영이 금지되면서, 과거 대회처럼 선술집에 모여 즐기던 단체 응원이나 거리 응원이 원천 봉쇄됐기 때문이다. 나라시의 한 상점가에선 매장에 중계를 틀지 말라는 이른바 'WBC 경찰'의 협박 편지까지 등장하며 방영을 포기하는 업주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TV 화면이 꺼진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라디오'였다. 유료 결제나 앱 접속에 거부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무료 중계로 몰리면서, 디지털 시대에 라디오를 켜고 야구 소식을 듣는 옛 풍경이 재현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번 대회는 일본 미디어 환경에 거대한 균열을 냈지만, 그 결말은 글로벌 자본의 승리라고만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의 거대 OTT 자본이 중계권을 장악하며 화려하게 등장했음에도, 일본이 8강에서 탈락하자마자 가장 당혹스러웠을 쪽은 넷플릭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패배 직후 소셜미디어(SNS)에는 '넷플릭스 해지'가 실시간 트렌드 1위에 올랐고, "일본이 졌으니 해지한다", "결국 WBC 말고는 볼 게 없었다"는 팬들의 이탈 선언이 줄을 이었다.
보편적 시청권과 스포츠의 공공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앞으로 거대 자본을 앞세운 OTT가 스포츠 중계 시장의 독점 체제를 굳혀갈지 아니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열을 가다듬은 지상파 방송사들이 반격에 성공하며 '무료 보편성'의 가치를 지켜낼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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