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리뷰] 매 순간 오감을 열어놓는 성실함으로 무가치함과 싸우다

  • 드라마 '모자무싸'의 황동만과 소설 '수인'의 박수영

“그가 대신 써준 자서전을 받아든 입후보자들은 그가 덧붙이고 상상한 자신들의 과거에 만족을 표했으며, 일부 문구들을 선거 홍보물에 고스란히 옮겨적기도 했다”

이기호의 소설 ‘수인’에서 박수영은 굉장히 열심히 살았다. 실력 있는 대필가로서 수많은 정치인의 자서전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4년 전 공모전에서 장편소설이 당선돼 등단한 뒤, 박수영은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하고 그 사이에 그 누구보다 실력 좋은 대필가로 치열하게 살았다.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박수영은 정치 선동·선전에 능한 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이기도 했나 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강원도 산골에 틀어박혀 있는 사이 대한민국은 원자력 발전소 두 곳이 폭발해 방사능이 유출됐다.
 
이에 UN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한국사람들 개개인을 조사한 후 직업과 자격에 따라 세계 여기저기로 이주시키려고 하는데, 박수영은 이 UN 심판관들로부터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소설가”라고 웅얼거린다.
 
그가 아무리 한 달에 1000장이 넘는 원고를 써 재낀 프로 대필가에다가 멋들어진 표현으로 정치인들을 띄운 선동가였어도 이 갈급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을 끝내 소설가로 규정했다.

“내 인생이 왜 니 마음에 들어야 되는데요?”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에서 황동만은 영화감독이다. 정확히는 앞에 ‘예비’를 붙여야 한다. 아직 정식으로 데뷔는 못했으니까. 20년 동안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를 들고 다니며 데뷔를 노리고 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영화감독 데뷔에 계속 실패하는 동안 황동만 역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학원에서 지망생들에게 시나리오 쓰는 법을 강의하고 출장 뷔페 아르바이트도 한다. 그 사이에 ‘감정 워치’ 테스트에 지원해 임상 실험 대상자로서의 활동도 병행한다.
 
학원에서 어떤 학생에게는 진심으로 ‘추앙’ 받기도 하는 황동만은 나름의 ‘말발’로 열정적인 강의를 선사한다. 매일 영화를 보면서 혹독한 비평을 쏟아내기는 그의 하루의 필수 일과이기도 하니, 황동만은 훌륭한 영화 비평가로서의 자질도 충분하다.
 
하지만 황동만은 도저히 영화감독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서 ‘40대 무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간다.
 
삽질과 폭식으로 무가치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박수영은 본인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방사능 접촉을 막기 위해 25m 두께 시멘트로 밀봉된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섰다. 교보문고 안에는 재고로 남아 있는 자신의 소설책이 있다. 그 소설책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 곡갱이질을 시작했다. 몇 날 며칠 반복된 이른바 ‘삽질’을 통해 그는 시멘트의 결을 파악하게 됐고 힘을 덜 쓰는 법을 터득하고 신체적으로 날렵해졌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사진=AI 생성 이미지]
 
어느 순간 내가 곡갱이인지 곡갱이가 나인지 모를 경지가 되고서야, 이 ‘삽질’이 소설 쓰는 일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즈음 드디어 해외 이주 허가가 떨어진다. 남은 벽의 두께는 약 30cm. 박수영이 판 굴의 상태가 그가 소설가임을 증명해줬다. 즉 이 굴은 곧 박수영의 소설이다.

자 그렇다면 황동만은 본인이 영화감독임을, 그러니까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까. 어린 시절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는 꽤 친했던 ‘8인회’ 멤버들을 향해 독설을 뿜어대는 것으로 황동만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운다. 자신이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시종일관 표현하는 것으로 그는 자신이 존재함을 힘겹게 증명한다.
 
황동만은 얼핏 영화감독이 되는 일보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1g도 사라지지 않는 것’에 더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읽어준 변은아가 “주인공에게 파워가 없다”는 신랄한 비평을 쏟아내는데 황동만은 아무 말도 못하고 폭식을 한다.
 
무가치함에 대항해 매순간 열려 있는 오감
충족되지 않은 존재의 가치는 세속적인 성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열려 있는 오감에서 온다. 박수영의 ‘삽질’이 그러하고 황동만의 ‘폭식’과 ‘독설’과 ‘성실’이 그러하다.
 
황동만은 매순간 성실하게 수다를 떨고, 충실하게 8인회의 심기를 건드리며, 본인의 시나리오를 계속 내밀고 다니고, 끼니를 잘 챙기며, 항상 음악을 듣고, 집에서는 매일 영화를 본다. 변은아가 황동만의 시나리오를 까면서도 “감독님은 천개의 문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며 그의 열려 있는 오감을 유일하게 알아본다.
 
사진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사진=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우리의 가치는 늘상 열어놓고 있는 ‘오감’에 있다고 소설 ‘수인’과 드라마 ‘모자무싸’는 말해주는 듯하다. 순간을 일일이 느끼고 반응하면서 삶 전체를 성실하게 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가난하고 무시당하고 별 것도 아닌 사람이어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말이다.
 
그걸 볼 줄 아는 어떤 사람은 그 반짝거리는 사람을 ‘추앙’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오감을 닫아버린 변은아가 황동만을 겪어보기로 결심한 것, 8인회 중에서 5편이나 영화를 개봉한 영화감독 박경세가 유난히 황동만을 증오하는 것은 그들이 황동만이라는 인간에게서 진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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