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권이 인공지능(AI)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따라 잡겠다”는 구호 대신 “이길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자”는 현실론이 전면에 등장했다. 최근 집권 자민당이 정리한 AI 정책 제언은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제언의 핵심은 “AI 전 분야의 순수 국산화는 현실적이지도, 전략적이지도 않다”였다.
사실 일본은 오랫동안 국산주의를 고집하는 성향이 강한 나라였다. 반도체도 운영체제(OS)도 휴대전화도 독자 생태계를 구축하려 했다. 결과는 냉혹했다. 세계 표준과 분리된 일본식 플랫폼은 결국 글로벌 경쟁에서 밀려났다. 일본 산업계가 자주 사용하는 ‘갈라파고스화’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실패를 의미한다. 이번 AI 전략은 그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일본 정부와 자민당이 사실상 ‘일본판 챗GPT’ 경쟁에서 한발 물러났다는 점이다. 경제산업성은 당초 정부 예산을 투입해 일본 독자 대규모 언어모델(LLM)을 육성하려 했다. 하지만 자민당 내부에서 “한정된 정책 자원으로 미국과 중국을 추격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됐다. 결국 일본 정부는 대규모 기초모델 개발 목표를 사실상 접었다.
냉정히 보면 일본의 판단은 현실적이다. 현재 생성형 AI 패권은 미국과 중국이 사실상 양분하고 있다. 미국의 오픈AI와 구글, 중국의 딥시크와 바이두는 이미 천문학적 자본과 데이터, 반도체 인프라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일본 정부의 2019~2023년 AI 투자 규모는 약 100억 달러 수준이다. 미국은 3290억 달러, 중국은 1330억 달러였다. 체급 자체가 다르다.
일본은 대신 자신들이 강점을 가진 영역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제조업과 의료, 로봇, 인프라 제어 같은 ‘현장형 AI’다. 최근 일본 정치권이 강조하는 피지컬 AI도 여기서 나왔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AI가 아니라 실제 공장과 병원, 자동차와 로봇을 움직이는 AI에 올인하겠다는 의미다.
이 전략은 일본 산업 구조와 정확히 맞물린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자동차 공장과 정밀기계, 산업용 로봇 현장에는 수십 년간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가 쌓여 있다. 미국 기업들이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경쟁력에 강하다면, 일본은 실제 산업 현장의 움직임과 생산 공정 데이터를 갖고 있다. 일본은 바로 그 틈새를 파고들겠다는 계산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이 이제 AI를 단순 기술 경쟁이 아니라 경제안보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민당은 이번 제언에서 ‘AI 주권’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자국산으로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은 자국이 직접 통제하고, 무엇은 동맹국과 협력할 것인지 전략적으로 구분하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는 일본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산업 중심의 실용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미국 기술과 협력하되, 실제 산업 현장에서 돈을 버는 구조와 핵심 데이터는 자국이 쥐겠다는 계산이다. AI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일본 사회의 위기감도 깔려 있다. 일본의 디지털 적자는 이미 연간 5조엔(약 50조원) 규모까지 커졌다. 클라우드와 소프트웨어, 플랫폼 사용료가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간다. AI마저 미국 플랫폼 의존도가 커지면 일본 산업 전체가 ‘AI 하청 구조’로 밀려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강하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 “세계 최고의 생성형 AI를 만들겠다”보다 “AI 시대에도 제조업 강국으로 살아남겠다”는 쪽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화려한 생성형 AI 경쟁에서는 한발 물러서지만, 공장과 병원, 자동차와 로봇이 움직이는 산업 현장만큼은 끝까지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일본이 선택한 가장 일본다운 AI 생존 전략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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