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장소가 더 강한 메시지를 남길 때가 있다. 정상회담이 어디서 열리느냐는 단순한 의전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방향과 분위기를 드러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는 19일 경북 안동에서 열리는 한일 정상회담은 최근 한일관계 변화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가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인 안동을 찾는다. 올해 1월 이 대통령이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적 기반이자 고향인 일본 나라(奈良)를 방문한 데 대한 답방 형식이다. 청와대는 이를 “정상 간 상호 고향 방문의 첫 실현”이라고 설명했다.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기존 셔틀외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정치적·문화적 뿌리를 직접 방문하는 ‘고향외교’가 시작됐다는 의미다.
사실 이번 안동 회담은 일본 내부에서도 상징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다카이치 총리가 간사이(關西) 출신 정치인이라는 점이 이번 외교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간사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오사카와 교토, 나라를 중심으로 재일한국인 사회도 깊게 형성돼 있다. 일본 외교가에서는 다카이치 총리가 상대적으로 한국 문화와 한국인 정서에 대한 거리감이 적은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일본 나라현 대표 문화유적지인 호류지(법륭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나라 역시 한반도와 역사적으로 연결성이 깊은 지역이다. 일본 고대 문화 형성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1월 이 대통령이 나라를 찾았던 것도 단순한 지방 방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는 해석이 나온 이유다.
이번 안동 회담은 과거 한일 정상외교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제주 정상회담이다. 당시 양국은 독도 문제와 역사 갈등으로 긴장이 높았지만 서울도 도쿄도 아닌 제주를 회담 장소로 택했다. 외교의 긴장감을 낮추고 보다 인간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뢰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번 안동 회담은 제주 회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제주가 ‘중립 공간 외교’였다면 안동은 보다 직접적인 ‘고향외교’다. 상대 지도자의 삶의 공간과 문화적 뿌리를 직접 공유하는 방식이다. 단순한 친교 행사가 아니라 정상 간 신뢰 구축을 외교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안동이라는 장소의 상징성도 결코 작지 않다. 안동은 한국 유교 문화와 전통 정신의 중심지다.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종가 문화가 남아 있는 도시다. 일본 총리가 그런 공간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방 일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과거사 갈등을 안고 있는 일본 지도자가 한국 전통문화의 본산을 방문하는 장면 자체가 하나의 외교 메시지가 되는 셈이다.
특히 이번 회담은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더욱 주목된다. 북한 문제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미·중 전략 경쟁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중동 불안까지 겹치면서 에너지·해상안보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한일 관계와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강조한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결국 한일 양국 모두 상대와의 관계 안정이 절실해진 상황이다. 일본은 미국 중심 안보 전략 속에서 한국과의 협력 없이는 동북아 전략 운용이 쉽지 않다. 한국 역시 공급망과 첨단산업, 경제안보 측면에서 일본과의 협력이 현실적 과제가 됐다.
물론 역사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다. 그러나 외교는 결국 미래의 필요가 과거의 갈등을 얼마나 관리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번 안동 회담은 한일관계가 단순한 실무 외교를 넘어 ‘관계의 온도’를 조정하는 단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무현·고이즈미의 제주 회담이 그 시대 한일관계의 상징 장면으로 남았듯, 이재명·다카이치의 안동 회담 역시 앞으로 한일관계를 설명할 때 반복해서 언급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는 서울도 도쿄도 아니었다. 서로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 자체가 지금 한일관계의 새로운 방향을 말해주고 있다.
2004년 7월 21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공동기자회견에서 노무현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