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지성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순간이 있다. 총칼을 들지 않았으나 전쟁보다 치열했고, 군함을 몰고 가지 않았으나 외교의 최전선에서 조국의 생존을 지켜낸 사람이 있다. 유민(維民) 홍진기 선생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으로 태어나 일본 제국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그 지식과 법리와 논리로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궤변을 무너뜨렸다. 역사의 아이러니였으나 동시에 역사의 정의였다. 일제가 심어놓은 법학과 국제법의 언어를 가지고, 그는 일제가 남긴 식민 지배의 논리를 해체했다. 칼이 아니라 문장으로 싸웠고, 함포가 아니라 법리로 맞섰으며, 분노가 아니라 이성으로 일본을 압도했다. 그러나 그 이성의 밑바닥에는 나라를 잃었던 세대의 아픔과 새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이 흐르고 있었다.
2026년 6월 12일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열린 현대일본학회와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춘계학술회의는 그런 유민 홍진기의 삶과 대일외교를 다시 역사 앞으로 불러낸 자리였다. 한일수교 60주년을 맞아 열린 이날 학술회의는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일본과 싸웠고,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무엇으로 국가의 존엄을 지켜냈는지를 되돌아보는 역사적 성찰의 장이었다.
우리는 흔히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한일관계의 출발점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대한민국의 국익과 주권을 지켜낸 수많은 보이지 않는 전투가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 바로 유민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토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외환도 없었으며, 외교력도 미약했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경제력과 국제적 영향력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한일회담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역청구권’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조선에 있던 일본인 재산에 대해서도 일본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당시 한국 재산의 85%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것이었다. 만약 이 논리가 받아들여졌다면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부터 경제주권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를 단순한 재산권 분쟁이 아니라 해방된 국가의 주권 문제로 보았다.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형성된 권리 역시 정상적인 권리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훗날 외교사와 국제법사에 길이 남게 되는 ‘해방의 법리’였다. 이 법리는 단순한 협상 기술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왜 독립국가인지, 왜 경제주권을 가져야 하는지, 왜 일본의 역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국가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특히 오늘 다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b항이다. 유민은 미국 측과의 교섭 과정에서 미군정이 실시한 일본 재산 처분의 효력을 인정하는 조항을 강화조약에 반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약 이 조항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과정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일본 재산권 문제를 둘러싼 끝없는 국제 분쟁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단순한 한일회담 대표가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 경제주권의 기초공사를 한 거인이었다. 오늘 대한민국 산업화의 토대가 된 귀속재산 역시 그 법적 정당성 위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학술회의에서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은 헤이그 육전법 제46조를 근거로 일본인의 사유재산 보호를 주장했지만, 유민은 원상회복의 법리에 근거해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는 것이다. 박경민 국민대 교수는 유민이 귀속재산 문제를 단순한 재산 문제가 아니라 해방국가의 경제주권 문제로 재구성했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유민이 국제정치와 외교를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당시 한국 사회를 크게 앞서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 전 주필·부사장은 유민의 또 다른 업적을 조명했다. 바로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이다. 이 부분은 오늘날 더욱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1954년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북진통일론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유민은 그 와중에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평화통일 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유민의 통일론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냉전의 가장 뜨거운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던 시절, 그는 승리와 패배의 논리를 넘어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평화통일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통일안이 아니었다. 전쟁의 시대를 넘어 평화의 시대로 가려는 국가전략이었다. 1955년 창당한 야당 민주당의 통일방안도 유민의 평화통일 원칙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유민의 평화통일 방안은 정파를 초월한 최초의 거국적 통일방안이 되었고, 자유진영 국가의 통일방안으로 승인돼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발표된 안이기도 했다. 훗날 등장한 북방정책과 햇볕정책의 문제의식 역시 그 안에서 미리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외교관이자 법률가였지만 동시에 시대를 앞서 내다본 전략가였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으로 태어나 일본 제국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그 지식과 법리와 논리로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궤변을 무너뜨렸다. 역사의 아이러니였으나 동시에 역사의 정의였다. 일제가 심어놓은 법학과 국제법의 언어를 가지고, 그는 일제가 남긴 식민 지배의 논리를 해체했다. 칼이 아니라 문장으로 싸웠고, 함포가 아니라 법리로 맞섰으며, 분노가 아니라 이성으로 일본을 압도했다. 그러나 그 이성의 밑바닥에는 나라를 잃었던 세대의 아픔과 새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이 흐르고 있었다.
2026년 6월 12일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열린 현대일본학회와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춘계학술회의는 그런 유민 홍진기의 삶과 대일외교를 다시 역사 앞으로 불러낸 자리였다. 한일수교 60주년을 맞아 열린 이날 학술회의는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일본과 싸웠고,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무엇으로 국가의 존엄을 지켜냈는지를 되돌아보는 역사적 성찰의 장이었다.
우리는 흔히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한일관계의 출발점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대한민국의 국익과 주권을 지켜낸 수많은 보이지 않는 전투가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 바로 유민이었다.
그러나 유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를 단순한 재산권 분쟁이 아니라 해방된 국가의 주권 문제로 보았다.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형성된 권리 역시 정상적인 권리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훗날 외교사와 국제법사에 길이 남게 되는 ‘해방의 법리’였다. 이 법리는 단순한 협상 기술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왜 독립국가인지, 왜 경제주권을 가져야 하는지, 왜 일본의 역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국가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특히 오늘 다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b항이다. 유민은 미국 측과의 교섭 과정에서 미군정이 실시한 일본 재산 처분의 효력을 인정하는 조항을 강화조약에 반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약 이 조항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과정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일본 재산권 문제를 둘러싼 끝없는 국제 분쟁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단순한 한일회담 대표가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 경제주권의 기초공사를 한 거인이었다. 오늘 대한민국 산업화의 토대가 된 귀속재산 역시 그 법적 정당성 위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학술회의에서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은 헤이그 육전법 제46조를 근거로 일본인의 사유재산 보호를 주장했지만, 유민은 원상회복의 법리에 근거해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는 것이다. 박경민 국민대 교수는 유민이 귀속재산 문제를 단순한 재산 문제가 아니라 해방국가의 경제주권 문제로 재구성했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유민이 국제정치와 외교를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당시 한국 사회를 크게 앞서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 전 주필·부사장은 유민의 또 다른 업적을 조명했다. 바로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이다. 이 부분은 오늘날 더욱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1954년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북진통일론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유민은 그 와중에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평화통일 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유민의 통일론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냉전의 가장 뜨거운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던 시절, 그는 승리와 패배의 논리를 넘어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평화통일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통일안이 아니었다. 전쟁의 시대를 넘어 평화의 시대로 가려는 국가전략이었다. 1955년 창당한 야당 민주당의 통일방안도 유민의 평화통일 원칙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유민의 평화통일 방안은 정파를 초월한 최초의 거국적 통일방안이 되었고, 자유진영 국가의 통일방안으로 승인돼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발표된 안이기도 했다. 훗날 등장한 북방정책과 햇볕정책의 문제의식 역시 그 안에서 미리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외교관이자 법률가였지만 동시에 시대를 앞서 내다본 전략가였다.
유민의 이름이 외교사에 영원히 남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53년 구보타 망언 파동이다. 일본 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인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와 더 비참했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른바 식민지 시혜론이었다.
그러나 유민은 즉각 반박했다.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건설할 능력이 있었으며, 일본의 침략은 결코 문명화가 아니라 강제점령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왜 카이로선언은 한국인이 노예 상태에 있었다고 규정했는가.”
그 질문 하나가 일본 논리 전체를 무너뜨렸다. 이후 회담은 중단되었고, 일본은 결국 구보타 발언과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했다. 당시 유민의 나이는 불과 서른여섯 살이었다.
이 장면을 두고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12일 학술회의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유민의 목소리는 일본인의 의식을 고치는 첫 불꽃이었다.”
참으로 통렬한 평가다. 외교는 단순히 문서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상대의 인식을 바꾸는 작업이다. 유민은 일본의 정책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역사 인식 자체와 싸웠다. 그것이 그의 외교가 위대한 이유다.
유민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1917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전주지방법원 판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그는 신생 대한민국 건설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법무부 조사국장과 법무국장,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쳤고 이후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동양방송(TBC)을 설립하고 중앙일보를 창간해 언론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유진오 박사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의 설계자이자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한국 법학계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런 그가 유민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단순히 머리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민은 법학 이론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국가 운영과 외교의 현실 속에서 구현해 낸 드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진오가 본 유민은 공부를 잘한 사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공부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성공을 위한 엘리트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을 위한 엘리트였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나라를 위한 천재’였다.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국제질서는 다시 거칠어지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 공급망 전쟁, 반도체 경쟁, 에너지 안보, 북한 핵 문제 등 거대한 도전이 밀려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유민의 메시지는 더욱 빛난다.
홍석조 이사장이 회고한 유민의 통찰은 그래서 특별한 울림을 준다.
“작은 나라일수록 국제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한마디는 사실상 유민의 유언과도 같다. 대한민국은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국가가 되었지만, 지정학적으로는 여전히 강대국 사이에 놓인 나라다. 유민이 평생 국제법 전문가 양성과 후학 교육에 힘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총보다 강한 것이 법이며, 군사력보다 오래가는 것이 국제규범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친왕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그는 장학사업을 통해 그 은혜를 사회에 돌려주었고, 국제법을 연구하는 후학의 양성을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여겼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유민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4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유민홀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단순한 추모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누구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역사적 이정표다. 나라가 가난할 때는 애국심이 필요했고, 나라가 약할 때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나라가 성장한 지금은 지혜가 필요하다. 유민 홍진기의 삶은 바로 그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힘이 부족할 때는 법으로 싸우고, 국력이 약할 때는 논리로 이기며, 역사의 상처를 미래를 여는 전략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유민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결국 유민 홍진기의 생애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는 일본의 패전을 대한민국의 해방으로 완성한 위대한 법률가였다.
패전은 일본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한국의 사건이었다. 그 둘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운 사람이 유민이었다. 누군가는 조약문을 읽어야 했고, 누군가는 국제법의 허점을 찾아야 했으며, 누군가는 일본의 궤변을 반박해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의 권리를 설명해야 했다. 그 일을 해낸 천의무봉의 천재가 바로 유민 홍진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유민을 읽는다. 그의 해방의 법리를 읽고, 구보타 망언을 꺾은 젊은 외교관의 용기를 읽고, 평화통일을 설계한 전략가의 백년대계를 읽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우리는 그만큼 준비되어 있는가. 오늘 우리는 그만큼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식민 지배는 시혜가 아니라 침탈이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밝히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침탈의 결과를 합법적 재산으로 둔갑시키려는 천부당만부당한 궤변을 막아내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해방된 나라가 자기 땅과 자기 재산과 자기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유민 홍진기의 해방의 법리는 바로 이 세 가지를 향해 있었다. 진리와 정의와 자유. 그것이 그의 법리의 뿌리였고, 그의 외교의 힘이었으며, 오늘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대한민국의 기본이다.
유민은 떠났지만 그의 질문은 남아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노예 취급을 당한 피해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어떻게 원한을 넘어 당당한 원칙으로 설 것인가. 법을 배운 사람은 누구를 위해 그 지식을 써야 하는가. 언론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후손은 무엇을 이어가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유민을 제대로 기린 것이 아니다. 유민을 기린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아니라 그의 정신을 오늘의 국가전략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 유민은 누구인가 ◆
유민(維民) 홍진기(1917~1986)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법률가이자 외교가, 행정가, 언론인이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고,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역사적 역할은 해방 이후 시작되었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법제 정비와 국가 운영의 최전선에 섰다. 법무부 법무국장으로서 국가 법제의 기초를 다졌고, 한일회담 대표로서 대한민국의 국익과 주권을 지켜냈으며,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국가 체제의 안정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1950년대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과 식민지배 정당화 논리를 국제법과 논리로 반박하며 대한민국 외교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이른바 ‘해방의 법리’였다. 그는 일본의 패전을 단순한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한국의 해방과 주권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역청구권 논리를 무력화했고, 대한민국 경제주권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b항을 추가해 해방의 법리를 토대로 귀속재산 문제를 대한민국의 권리로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유민은 법률가와 외교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평화통일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1954년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을 정리해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평화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훗날의 북방정책과 햇볕정책보다 수십 년 앞선 문제의식이었다. 또한 중앙일보 창간을 통해 언론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으며, 후학 양성과 장학사업에도 평생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한마디로 법률가의 지식을 국가의 생존 전략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일본의 패전을 대한민국의 해방으로 완성한 사람, 그리고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와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법과 원칙과 국제규범임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유민 홍진기였다.
◆ 유민 홍진기 선생이 후손들과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
유민 홍진기의 생애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국은 단순한 구호인가, 아니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바치는 실천인가.
유민은 평생 자신의 삶으로 그 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라를 사랑했지만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분노했지만 분노를 국제법의 논리로 승화시켰고, 약소국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결코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더 공부해야 하고, 더 준비해야 하며, 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정신은 “작은 나라일수록 국제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로 압축된다. 이는 단순히 국제법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강대국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약소국은 법과 원칙과 외교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국가 생존의 철학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미중 경쟁과 지정학적 갈등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하게 다가온다.
유민은 또한 후학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친왕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그는 훗날 장학사업과 학술 지원을 통해 그 은혜를 사회에 돌려주었다. 그는 다음 세대의 인재를 키우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총보다 강한 것이 법이며, 군사력보다 오래가는 것이 국제규범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유민이 후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감정보다 실력, 구호보다 준비, 선동보다 지성이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더 공부하고, 더 원칙을 세우고, 더 큰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의 존엄과 자유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민 홍진기가 후손들과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다.
◆『유민 홍진기와 대일외교』 4인의 저자 ◆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는 중앙일보에서 40여 년간 근무했고, 6년간 주필로 재직하면서 열린 지적 사유와 치열한 비판의식으로 합리적·개방적·통합적 논조를 주도했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존경받는 언론인이다. 2002년 정치인과 국민의 이념 성향을 정밀하게 계량화한 ‘이념노선 대해부’ 기사로 한국 언론사의 큰 획을 그었고,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이번 저서에서는 유민 홍진기의 생애와 사상을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이원덕 국민대학교 교수는 국내 최고의 한일관계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한일회담, 청구권 협상, 과거사 문제 연구의 권위자로서 대일배상요구조서와 역청구권 논쟁,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의미를 실증적으로 복원해 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3만5354쪽에 달하는, 13년 8개월간의 한일회담 문서를 검증하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를 통해 일본 정부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법적 책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정립하고, 국내 피해자 보상입법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는 한국 현대사와 냉전사, 한미관계사 연구의 대표 학자다. 그는 유민의 활동을 냉전과 국가 건설이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며, 외교가이자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했다.
박경민 국민대학교 교수는 일제강점기 재조 일본인 연구와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을 연구해 온 학자다. 그는 귀속재산 문제와 해방의 법리를 중심으로 유민 홍진기의 국제법적 업적과 경제주권 수호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다.
이 네 사람의 공동 작업은 단순한 인물 전기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외교사의 출발점과 국가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복원하는 지적 작업이며, 유민 홍진기라는 한 인물을 통해 대한민국이 어떻게 주권과 존엄을 지켜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유민은 즉각 반박했다.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건설할 능력이 있었으며, 일본의 침략은 결코 문명화가 아니라 강제점령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왜 카이로선언은 한국인이 노예 상태에 있었다고 규정했는가.”
그 질문 하나가 일본 논리 전체를 무너뜨렸다. 이후 회담은 중단되었고, 일본은 결국 구보타 발언과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했다. 당시 유민의 나이는 불과 서른여섯 살이었다.
이 장면을 두고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12일 학술회의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유민의 목소리는 일본인의 의식을 고치는 첫 불꽃이었다.”
참으로 통렬한 평가다. 외교는 단순히 문서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상대의 인식을 바꾸는 작업이다. 유민은 일본의 정책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역사 인식 자체와 싸웠다. 그것이 그의 외교가 위대한 이유다.
유민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1917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전주지방법원 판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그는 신생 대한민국 건설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법무부 조사국장과 법무국장,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쳤고 이후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동양방송(TBC)을 설립하고 중앙일보를 창간해 언론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유진오 박사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의 설계자이자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한국 법학계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런 그가 유민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단순히 머리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민은 법학 이론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국가 운영과 외교의 현실 속에서 구현해 낸 드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진오가 본 유민은 공부를 잘한 사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공부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성공을 위한 엘리트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을 위한 엘리트였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나라를 위한 천재’였다.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국제질서는 다시 거칠어지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 공급망 전쟁, 반도체 경쟁, 에너지 안보, 북한 핵 문제 등 거대한 도전이 밀려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유민의 메시지는 더욱 빛난다.
홍석조 이사장이 회고한 유민의 통찰은 그래서 특별한 울림을 준다.
“작은 나라일수록 국제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한마디는 사실상 유민의 유언과도 같다. 대한민국은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국가가 되었지만, 지정학적으로는 여전히 강대국 사이에 놓인 나라다. 유민이 평생 국제법 전문가 양성과 후학 교육에 힘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총보다 강한 것이 법이며, 군사력보다 오래가는 것이 국제규범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친왕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그는 장학사업을 통해 그 은혜를 사회에 돌려주었고, 국제법을 연구하는 후학의 양성을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여겼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유민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4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유민홀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단순한 추모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누구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역사적 이정표다. 나라가 가난할 때는 애국심이 필요했고, 나라가 약할 때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나라가 성장한 지금은 지혜가 필요하다. 유민 홍진기의 삶은 바로 그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힘이 부족할 때는 법으로 싸우고, 국력이 약할 때는 논리로 이기며, 역사의 상처를 미래를 여는 전략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유민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결국 유민 홍진기의 생애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는 일본의 패전을 대한민국의 해방으로 완성한 위대한 법률가였다.
패전은 일본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한국의 사건이었다. 그 둘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운 사람이 유민이었다. 누군가는 조약문을 읽어야 했고, 누군가는 국제법의 허점을 찾아야 했으며, 누군가는 일본의 궤변을 반박해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의 권리를 설명해야 했다. 그 일을 해낸 천의무봉의 천재가 바로 유민 홍진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유민을 읽는다. 그의 해방의 법리를 읽고, 구보타 망언을 꺾은 젊은 외교관의 용기를 읽고, 평화통일을 설계한 전략가의 백년대계를 읽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우리는 그만큼 준비되어 있는가. 오늘 우리는 그만큼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식민 지배는 시혜가 아니라 침탈이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밝히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침탈의 결과를 합법적 재산으로 둔갑시키려는 천부당만부당한 궤변을 막아내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해방된 나라가 자기 땅과 자기 재산과 자기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유민 홍진기의 해방의 법리는 바로 이 세 가지를 향해 있었다. 진리와 정의와 자유. 그것이 그의 법리의 뿌리였고, 그의 외교의 힘이었으며, 오늘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대한민국의 기본이다.
유민은 떠났지만 그의 질문은 남아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노예 취급을 당한 피해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어떻게 원한을 넘어 당당한 원칙으로 설 것인가. 법을 배운 사람은 누구를 위해 그 지식을 써야 하는가. 언론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후손은 무엇을 이어가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유민을 제대로 기린 것이 아니다. 유민을 기린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 아니라 그의 정신을 오늘의 국가전략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 유민은 누구인가 ◆
유민(維民) 홍진기(1917~1986)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법률가이자 외교가, 행정가, 언론인이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고,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역사적 역할은 해방 이후 시작되었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법제 정비와 국가 운영의 최전선에 섰다. 법무부 법무국장으로서 국가 법제의 기초를 다졌고, 한일회담 대표로서 대한민국의 국익과 주권을 지켜냈으며,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국가 체제의 안정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1950년대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과 식민지배 정당화 논리를 국제법과 논리로 반박하며 대한민국 외교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이른바 ‘해방의 법리’였다. 그는 일본의 패전을 단순한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한국의 해방과 주권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역청구권 논리를 무력화했고, 대한민국 경제주권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b항을 추가해 해방의 법리를 토대로 귀속재산 문제를 대한민국의 권리로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유민은 법률가와 외교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평화통일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1954년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을 정리해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평화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훗날의 북방정책과 햇볕정책보다 수십 년 앞선 문제의식이었다. 또한 중앙일보 창간을 통해 언론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으며, 후학 양성과 장학사업에도 평생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한마디로 법률가의 지식을 국가의 생존 전략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일본의 패전을 대한민국의 해방으로 완성한 사람, 그리고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와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법과 원칙과 국제규범임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유민 홍진기였다.
◆ 유민 홍진기 선생이 후손들과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
유민 홍진기의 생애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국은 단순한 구호인가, 아니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바치는 실천인가.
유민은 평생 자신의 삶으로 그 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라를 사랑했지만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분노했지만 분노를 국제법의 논리로 승화시켰고, 약소국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결코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더 공부해야 하고, 더 준비해야 하며, 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정신은 “작은 나라일수록 국제법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로 압축된다. 이는 단순히 국제법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강대국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약소국은 법과 원칙과 외교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국가 생존의 철학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력을 갖추었음에도 미중 경쟁과 지정학적 갈등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하게 다가온다.
유민은 또한 후학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친왕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그는 훗날 장학사업과 학술 지원을 통해 그 은혜를 사회에 돌려주었다. 그는 다음 세대의 인재를 키우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총보다 강한 것이 법이며, 군사력보다 오래가는 것이 국제규범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유민이 후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감정보다 실력, 구호보다 준비, 선동보다 지성이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더 공부하고, 더 원칙을 세우고, 더 큰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의 존엄과 자유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민 홍진기가 후손들과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다.
◆『유민 홍진기와 대일외교』 4인의 저자 ◆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는 중앙일보에서 40여 년간 근무했고, 6년간 주필로 재직하면서 열린 지적 사유와 치열한 비판의식으로 합리적·개방적·통합적 논조를 주도했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존경받는 언론인이다. 2002년 정치인과 국민의 이념 성향을 정밀하게 계량화한 ‘이념노선 대해부’ 기사로 한국 언론사의 큰 획을 그었고,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이번 저서에서는 유민 홍진기의 생애와 사상을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이원덕 국민대학교 교수는 국내 최고의 한일관계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한일회담, 청구권 협상, 과거사 문제 연구의 권위자로서 대일배상요구조서와 역청구권 논쟁,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의미를 실증적으로 복원해 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3만5354쪽에 달하는, 13년 8개월간의 한일회담 문서를 검증하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를 통해 일본 정부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법적 책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정립하고, 국내 피해자 보상입법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는 한국 현대사와 냉전사, 한미관계사 연구의 대표 학자다. 그는 유민의 활동을 냉전과 국가 건설이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며, 외교가이자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했다.
박경민 국민대학교 교수는 일제강점기 재조 일본인 연구와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을 연구해 온 학자다. 그는 귀속재산 문제와 해방의 법리를 중심으로 유민 홍진기의 국제법적 업적과 경제주권 수호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다.
이 네 사람의 공동 작업은 단순한 인물 전기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외교사의 출발점과 국가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복원하는 지적 작업이며, 유민 홍진기라는 한 인물을 통해 대한민국이 어떻게 주권과 존엄을 지켜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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