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굉장히 작은 영화로 시작된다고 생각했는데, 딸들이 붙으면서 버젯(예산)도 커졌고 영화가 준비되는 힘도 생겼어요. 제가 맨 처음 캐스팅된 배우라 책임감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개봉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딸들 덕이 큰 것 같아요."
이정은은 '경주기행' 시나리오가 마음에 쏙 들면서도 우려가 뒤따랐다고 말했다. '옥실'이 가지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옥실로서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그게 저에게는 도전이었어요. 액션 시퀀스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 색채도 제가 그동안 안정적으로 선택해 온 작품들과 달랐거든요. 파도가 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배우로서는 두려웠어요. 제가 과감하게 작품을 선택하는 편은 아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평범한 소시민인 옥실이 가족을 잃고 추락하며 피폐해지는 과정은 관객의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일상성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감정의 극단적인 낙차를 보여주는 것은 옥실이라는 캐릭터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정은은 자신의 친근한 얼굴이 옥실 서사에 설득력을 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좀 귀엽지 않나요. 하하. 약간 순둥순둥한 엄마들을 많이 했잖아요. 범죄의 흔적이 없어 보이는 사람, 민간인의 얼굴을 하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피폐해져 있을까, 감독님은 그런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구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역할에 딱 준비돼 있었다기보다, 감독님과 만나서 시너지가 생긴 케이스라고 생각해요. 감독님은 사람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깊이나 층위를 잘 알고 있어서 설명도 빠르고 정확해요. '옥실이라면 이런 설명은 안 할 것 같은데요'라고 배우가 접근할 수 있게 자유를 주면서도, 본인이 쓴 세계를 명확히 쥐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도 더 신뢰를 많이 했죠."
맹목적인 복수심 하나로 가족을 이끌던 옥실의 감정선은 극 후반부에 이르러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지독한 무게감으로 변모한다.
"딸들과 같이 촬영할 때는 아무리 힘든 신이라도 함께 가는 에너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딸들의 신이 끝나고 저 혼자 남는 식으로 찍기 시작할 때는 두렵더라고요. 야간 차량 촬영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그때 묘한 고요함이 있었어요. 산을 오르고 숨이 차오르는 장면에서 제가 보지 못한 얼굴이 나오더라고요. 괴기스럽기도 하고, 집념의 끝에 보이는 얼굴 같기도 했죠. 배우로서 제가 알던 제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순간을 보는 게 묘했어요. 실제로 실행(복수)을 할 때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고 피가 느껴지는 상대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 많이 노력했습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끝내 옥실을 버티게 한 건 결국 가족의 연대다. 이정은은 실제로도 함께 호흡을 맞춘 '딸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며 애정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공)효진 배우는 좋은 시나리오를 볼 줄 알고, 장주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아는 똑똑한 배우예요. 괜한 에너지 낭비 없이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서 촬영 내내 '효진이 얼굴이 너무 좋다'고 칭찬했어요. 이연, (박)소담 배우 역시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열정과 패기가 있었고요. 그들의 성장을 보는 관객으로서도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장면이 시작되면 집중도가 높아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그게 명장면을 완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숱한 작품을 쉼 없이 오가며 묵직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이정은. '경주기행'은 그간 대중에게 각인된 익숙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스스로의 스펙트럼을 넓힌 의미 있는 이정표다.
"현장에서는 절대 퍼지지 않으려고 해요. 다 같이 으쌰으쌰 해야 하는 순간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얼굴이 나올 때가 있죠. 예전에는 콘텐츠가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서 안정적인 선택을 해왔다면, 나이가 들수록 저의 모럴을 조금 벗어나서 다른 역할도 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내년 중반까지는 약속된 작품들로 바쁠 예정이에요. 작년에 슬럼프가 와서 잠시 쉬었는데, 한참 쉬니까 또 작업이 그립더라고요. 일정을 마치면 좀 쉴 예정이지만, 서로 장면을 보고 공을 나누며 협력하는 영화 특유의 밀도감이 좋아서 앞으로도 작은 영화는 계속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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