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으로 유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지난 3월 국내 정유 4사는 가격 결정권을 내려놓았다. 전쟁 특수로 큰돈을 벌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물가 안정과 민생이 우선이라는 대의 아래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하기로 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전쟁으로 유가가 치솟자 1997년 석유류 가격 자유화 이후 약 30년 만에 휘발유·경유·등유 공급가격에 상한을 씌웠다. 기업들은 가격 동결에 따른 손실은 사후 재정한다는 정부 약속만 믿고 기꺼이 고통 분담에 나섰다.
벌써 7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정부가 석유제품 최고가격을 11차례 정하는 동안 정작 정유 4사는 손에 한 푼도 쥐지 못했다. 정산에 대한 부담에 석유최고액정산위는 결국 감사원에 'SOS'를 치기에 이른다.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부와 최고액정산위는 정유사 손실 보상금을 확정하기 전에 감사원 사전컨설팅을 받는다고 한다. 정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후 책임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는 게 업계 관측이다. 반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기보다는 장기간 최고가격 지정에 따른 후폭풍을 피하고자 책임을 피할 장치부터 챙긴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최고액정산위는 전례 없이 정산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만큼 향후 시비에 휘말릴 위험을 최소화하고자 사전컨설팅을 받겠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 바로 최고액정산위다. 회계·법률·석유시장 전문가와 정부위원 등 20명이 머리를 맞댔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의 무게는 감사원에 기대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정유 4사 입장에선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시장에선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삼성전자의 천문학적인 실적에 주목하지만 사실 삼성전자 못지않은 '역대급' 호황을 누리는 기업이 한 군데 더 있다. 바로 세계 최대 정유사인 아람코다. 높은 유가와 정제마진에 힘입어 삼성전자와 전 세계 영업이익 1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하지만 최고가격제라는 족쇄를 차고 있는 정유 4사에는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애초 정부는 최고가격제에 따른 정유 4사의 손실을 분기 단위로 정산하도록 했다. 첫 정산 기간인 3월 13일~6월 30일분은 석 달 전에 정산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정유 4사 자료 제출 기한은 8월에서 9월로 한 달가량 밀렸고 자료를 제출한 뒤에도 보완 요구가 여러 차례 이어졌다. 정부와 최고액정산위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더는 정산을 미루면 안 된다는 정유 4사의 간곡한 호소에 정부는 11월 말 첫 정산액을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조차 제대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정부의 정산액에 불만을 가진 업체가 이의신청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두 번째 정산 기간인 7~9월분 정산 절차는 아직 시작조차 못 했다.
이는 정부가 얼마나 준비 없이 최고가격제를 시행했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준비 없이 시작한 정책에 기업들은 매출· 영업이익 확대를 통한 성장 기회 상실이라는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간도 문제다. 정부가 손실보전용으로 확보한 목적 예비비 4조2000억원을 올해 내로 집행하지 못하면 불용 처리된다. 연말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두 달 남짓이다.
이제 정부와 최고액정산위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우선 1차 정산금을 연내에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 간 다툼이 없는 항목은 우선 지급하고 쟁점 항목은 추후 정산해도 늦지 않다. 적정 마진과 원가 인정 범위의 기준도 명확히 공개해야 한다. 비공개 심의와 감사원 컨설팅을 거쳐 나온 숫자를 시장과 기업이 받아들일 리 없기 때문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