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1] 대한민국 경제 태동시킨 ‘호암 경영학’


2010년 2월 12일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1910. 2. 12~1987. 11. 19)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방이후 한국의 현대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아마도 ‘산업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을 일군 호암의 삶은 바로 한국의 산업화 과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육성해가는 과정에서 그는 한 세기를 뛰어넘는 철학과 경영이념으로 한국이 일제침략과 한국전쟁의 잿더미에서 세계 9위의 산업대국 대열에 들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아주경제는 호암 탄생 100년을 맞아 호암의 삶과 기업관, 경영이념  그리고 현재 삼성그룹에 면면히 남아 흐르고 있는 호암의 경영 DNA를 20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주>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 원산 함흥 심경 봉천 북경 청도 상해를 잇는 약 두 달 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29세의 청년 호암. 그가 대구에 삼성상회의 간판을 내건 것은 1938년 3월 1일 이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몇 년간의 방황 끝에 사업에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고 결심한 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와 마산일출자동차회사를 운영하며 큰 돈을 벌긴 했지만, 이 여행을 떠나기 이전까지 호암은 본격적인 사업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는 못했던 듯 하다.


삼성상회를 설립하기 한 해 전 호암은  은행융자를 끼고 약 200만평(66만㎡)에 달하는 토지를 사들였다가 중일전쟁의 발발로 땅값이 폭락하고 은행이 대출을 중단하면서 모든 사업을 정리해야 했다.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해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땅 투기에 나선 당시 호암의 모습은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경영인 호암 이병철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호암 스스로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호암자전에서 “이 실패는 그 후의 사업 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되었다. 사업가는 첫째 국내외 정세의 변동을 정확하게 통찰해야 하며, 둘째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능력과 그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하고, 셋째 요행을 바라는 투기를 절대로 피하고, 넷째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2, 제3의 대비책을 미리 강구함으로써 대세가 기울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의 경험이 이후 호암의 경영이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사업실패로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호암은 2개월간의 여행을 통해 당시의 국제정세와 시장의 흐름 파악에 나선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격동에 휩싸인 동아시아를 직접 체험하며 호암이 느낀 것은 바로 비좁은 조선을 벗어나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망한 나라의 젊은 사업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사업은 바로 무역업이었다.  비교적 소자본으로 가능한데다 일본이 점령한 만주지역에 건어물과 청과류의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을 간파한 결과였다.  식민지의 젊은 사업가에게는 일종의 틈새시장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삼성상회는 교통이 편리하고 청과류의 매집이 용이한 대구 서문시장 인근의  200평 남짓한(660㎡) 목조건물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다.


회사이름을 ‘삼성’으로 짓게 된 배경에 대해 호암은  “‘삼(三)’은 크고 강하다는 뜻이며,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 ‘성(星)’은 밝고 높고 깨끗이 빛나며 또 영원한 그 무엇이다. 이런 바람을 담아 ‘삼성’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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