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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100년 DNA 3-1] 해외로… 해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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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5-2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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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해외 진출 이후 20년 만 세계 굴지 건설사로 ‘봉이 정선달’… 사진 한장으로 시작한 조선사업

1960년, 마침내 수주량 기준 국내 1위 건설사로 올라선 현대건설은 이내 해외로 눈을 돌린다. 국내 시장에서의 한계를 느낀 것이다. 정주영에게 안주는 곧 퇴보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 건설업계는 해외 사업 경험이 전무했다. 해외 유수의 건설사와 대등하게 경쟁할 역량이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그런 와중에 정주영의 동생이자 당시 현대건설 상무이사였던 정세영은 1965년 대한건설협회 시철단 일원으로 동남아를 돌아보던 중 태국서 세계은행 자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 회장은 그에게 즉시 “현지에 눌러 앉아 공사를 따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1966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에서 정주영(오른쪽 두번째)이 현장 직원들과 상의하는 모습. (사진=정주영 박물관)

◆해외에 첫 발 내딛다=
형의 지시를 받은 정세영은 이 사업 수주에 성공한다.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는 98㎞ 길이의 2차선 도로였다. 낙찰 가액은 522만 달러(당시 한국 돈으로 약 14억7900만원)로 큰 규모였다. 이는 1966년 한 해 국내 건설사가 따낸 전체 계약 금액의 61.6%에 달했다.

공사는 순탄치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로 건설용 모래와 자갈은 마를 새가 없었고,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 미국인 감리는 국제 규격에 맞지 않다며 재시공을 요구하기 일쑤였다.

결국 현대건설은 이 공사에서 계약 금액의 20%에 달하는 2억8800만원의 막대한 적자를 냈다. 투입 금액은 총 17억6700만원.

하지만 회사는 이 손실 이상의 큰 수확을 얻었다. 이번 공사를 계기로 10년 동안 태국서 7개 공사, 총 62억2970만원 어치의 공사를 맡게 된다. 이뿐 아니다. 현대건설이 얻게 된 가장 큰 수확은 이후 국내외 초대형 사업을 맡을 수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획득하게 된 것이었다.

회사는 이듬해인 1966년, 월남전에도 참여했다. 치열한 전선 한가운데였던 메콩강 유역의 준설 작업에 준설선 ‘현대 1호’가 투입된 것.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업을 거절한 정주영에게 미 월남 사령관이 권총을 들이대며 협박한 것이며, 베트콩의 공격을 막기 위해 5분 간격으로 배 주위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작업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건설은 이후 약 6년 동안 이 곳에서 66억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인다.

회사는 이를 시작으로 영하 40도의 알래스카 산 속 교량공사, 괌의 주택.군사기지 공사, 파푸아뉴기니 지하 수력발전소 공사, 호주 항만 준설공사 등 각종 해외 사업도 맡게 된다.

또 이 같은 해외 건설역량은 한국의 젖줄이 된 경부고속도로 공사(1968~1970년)와 오일 쇼크에 당당히 당시 국내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오일 머니를 벌어들인 중동 주베일 항만 공사 수주(1976년)라는 성과로 이어진다.

◆경부고속도로 “우리 길은 우리가…”=1967년 말, 정주영에게 또 다른 임무가 주어진다. 12월 1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로 간 정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제반 사항을 논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일 준공에 들어갔다. 대통령이 추진위원장을 맡은 사상 초유의 대공사였다.

   
 
 1971년 영동고속도로 공사장에서 현장을 감독하는 정주영(오른쪽). 정주영은 사장임에도 작업복 차림이 훨씬 잘 어울리는 '현장의 사나이'였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현대건설은 429㎞ 구간 중 서울~오산 105㎞와 대전~옥천 28㎞ 구간을 맡았다. 전체의 약 5분의 2에 해당한다.

돈이 부족했던 만큼 경비절감과 속도전이 필수였다. 현대건설은 서울~오산(105㎞) 구간을 10개월 만에 개통(1968년 12월), 세계 고속도로 공사 역사상 최단기간 기록을 갈아치웠다.

소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던 옥천 공구 당제 터널은 경부고속도로 전체 공사 중에서도 최대 난공사였다. 벽이 무너져 내리며 세 사람의 사망자도 나왔다. 지금도 터널이 이어지는 이 곳을 지날 때면 당시의 험난했던 공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 6월, 마침내 이 곳 마저 뚫렸다. 이로써 경부고속도로는 완전 개통됐다. 정주영 회장이 적자를 감수하고 장비와 물자를 총동원하는 것도 모자라 본인이 직접 현장 사무소 야전 침대에서 먹고 잔 노력의 결과였다. 또 목숨을 담보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을 일한 직원들의 노고 덕분이었다.

준공식 때 현장감독들이 모두 눈물을 흘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테이프를 끊고 있는 정주영(맨 오른쪽)과 대통령 내외. (사진=정주영 박물관)

   
 
중동 손님을 맞는 정주영. 아무런 연고가 없는 중동 진출은 치열한 외교전을 방불케 했다. 중동 손님들을 초대하고 또 정주영 자신이 직접 중동을 찾아가 관계자들을 만나 신뢰를 쌓는 일은 사업을 함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일 중 하나였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중동 오일달러를 잡아라=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배럴당 1달러 75센트이던 원유값이 2년 만에 10달러까지 올랐다.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던 한국은 당연히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 기업들은 하나 둘씩 부도 위기에 몰렸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주영은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인 1975년을 ‘중동 진출의 해’로 정하고 곧 1억 달러 전후의 조선소 사업 두 건을 연이어 따낸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현대건설은 1975년, ‘20세기 최대의 공사’로 불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전에 나섰다.

이 곳 산업항은 길이 500m가 넘는 50만t급 대형 유조선 4대를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였다. 방파제 축조가 1068m, 콘크리트로 쌓은 암벽 길이는 무려 2980m였다. 금액 또한 어마어마했다. 공사 금액은 9억4464만 달러(약 4600억원)로 당시 국가 예산 절반에 해당했다.

현대는 미국, 영국, 서독, 네덜란드 등 9개 경쟁사를 따돌리고 이를 수주했다. 또 현지에서의 숱한 어려움을 이겨낸 끝에 성공리에 공사를 마쳤다.

정주영은 자서전 ‘시련은 있고 실패는 없다’(1991년)를 통해 “(공사 규모는 차치하고도) 기술과 모든 분야에서 우리 현대의 일대 도약의 기점이 되었던 것에서 이 대역사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술회했다.

현대건설이 세계적인 건설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순간이었다. 7억 리알(약 2억 달러)짜리 현금 수표를 받게 된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사상 최대였다.

   
 
20세기의 대 역사로 불리는 주베일 산업항이 완공된 모습. 수주에서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한편의 드라마처럼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500원짜리 한 장 들고=
시간을 다시 6년 되돌린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조선소 현대에 건설을 지시한다.

대통령의 지시에 정주영은 돈과 기술을 빌리러 일본, 캐나다, 미국의 조선사를 방문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국내에서도 ‘일개 토목 회사인 현대가 어떻게 조선소를 짓겠나’는 회의론이 더 우세했다.

하지만 여기서 굽힐 정주영이 아니었다. 그는 아예 차관을 빌려 독자적인 기술로 조선소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1971년 이번에는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 애플도어사 및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와 기술 협조 계약을 체결한 뒤 현대조선소 건립 최대 난제인 차관 확보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현대 비행기에서 내리는 정주영.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수많은 공사가 현대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다투는 정주영으로서는 유난히 비행기 여행이 많았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여기서부터 정주영이 스스로를 ‘봉이 정선달’이었다고 부른 유명한 일화가 시작된다.

버클레이 은행을 움직이기 위해 롱바톰 애플도어 회장을 만난 정주영은 “한국의 상환능력이 의심스럽다”며 곤란해 하는 롱바톰 회장에게 다짜고짜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준다.

그리고는 “우리는 1500년 전 철갑선을 만든 실적과 두뇌를 갖고 있다. 산업화가 늦어져 그 동안 아이디어가 녹슬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말에 움직였는지 롱바톰 회장은 버클레이 은행과의 만남을 주선해 줬다.

천신만고 끝에 버클레이 은행 부총재를 만난 정주영은 또다시 ‘옥스포드 유머’로 “누군가 배를 살 사람을 데려온다면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옥스포드 유머’란 정주영이 미팅 전 옥스포드대학을 잠시 관람한 것을 근거로 옥스포드 대학의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허언(虛言)으로 당사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일화다.

이제 차관을 위해서는 배를 살 사람이 필요했다. 소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한적한 바닷가의 백사장 사진만 보여주고 “우리는 여기서 배를 만들거다. 배를 사 달라”는 정신나간 부탁을 해야 했다. 정주영은 미친 듯이 선주를 찾아 다닌 끝에 스위스의 거물 해물업자인 리바노스로부터 26만t급 배 두 척을 주문 받는다.

사진 한 장만 들고 배를 팔러 다닌 정주영이나 이를 믿어주며 배를 두 척이나 사겠다고 한 리바노스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차관 문제를 해결한 현대는 1972년 조선소 기공과 동시에 선박 건조에 나섰고, 그로부터 30개월 후 조선소는 물론 선박 건조도 성공리에 마쳤다. 이같은 어려움 끝에 출범한 현대중공업은 현재 독보적인 세계 조선업계 1위 업체다.

그때의 모험이 한국을 세계 최대의 조선 강국으로 만든 것이다.

   
 
1974년, 스위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로부터 발주받은 7301호 선박 내에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함께. 맨 왼쪽 앳된 모습의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모습도 보인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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