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게 마련이다. 중력의 법칙이 공간을 지배하고 운동의 원리가 시간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돌고 움직이고 달라지지 않으면 공간, 시간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다.
공허, 혼돈이라는 빅뱅 이전의 무아지경. 무게는커녕 질량과 에너지의 존재조차 알 수 없는 깜깜한 상태다. 공포스런 숨막힘, 죽음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다행히 버젓이 세월이 흐르고 삼라만상이 변해 문명과 역사가 생겨 있다. 매일 밤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아도 아침이면 태양이 쨍하고 떠서 밝은 하루를 선물하듯 문명은 이미 존재의 일부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의 정황을 상상할 수 없듯 이제 와서 문명이 없는 상태를 꿈꾸기란 불가능하다.
발달된 문명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모든 인위적, 자연적 존재들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산물이다. 특히 역동하는 인간 정신사의 결과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기절하지 않은 불굴의 인간 정신이 요모조모 물질을 결합하고 변형, 변질시켜 문명의 단위를 하나 하나 만들었다.
문명의 알파부터 오메가 전반에 걸쳐 압권은 영장류 인간들의 집단지성적 네트워크다. 잉여와 위계를 만들어 생존의 질곡에서 벗어나고, 질량있는 모든 에너지와 입자를 미세한 것까지 다루어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서비스 수요마저 창출해 내는 전능함은 위대한 지적 네트워크가 작용한 결과다.
21세기 문명은 2번의 대규모 대륙간 현대전과 무수한 국지전, 에너지와 경제 전쟁을 거치며 터득한 공리와 평화, 조화와 인내의 메커니즘을 품고 있는 위대한 문명이다.
스스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품은 문명은 되돌리기는커녕 부정될 수도 없다. 인간들의 착오나 잠시의 역사적 이벤트로 스르르 사라진 듯 해도 지나놓고 보면 어느새 어제의 문명 위에 얹혀진 '오늘의 문명'이 떡 하니 눈 앞에 있다. 심지어 사라진 문명일지언정 그것은 깜빡 잊혀진 문명일 뿐이다. 없었던 문명인 듯 구는 것은 문명에 대한 기억상실이다.
문명에 대한 기억상실은 가장 심각한 정신분열 증세다. 이런 정신분열은 으레 집단적이며 권력이 조성한 문화의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문명에 대한 기억상실은 사실은 고의적이며 인위적인 것이다. 이기적인 생존욕구의 발로이건 위대한 영도자를 옹립하는 행동이건 일부러 미친 척 하는 것이다. 서로 울고 불고 열광하며 다 미쳐서 서로 미친 줄 모르고 찢고 발광하는 것이다.
지구가 돌고 우주가 이동하며, 시공간이 휘어지고 문명이 피었다 지면서 세상이 변하는데, '나만 안 변하면 돼' 우격 다짐하며 기억상실 흉내를 내는 박제된 이념의 사생아. 이념의 조화로 장식된 석관 안에 가두어진 '살아 있는 사체'들의 무덤. 썩어버린 사과, 부패한 생선을 싱싱하다 우겨 대는 집단 정신분열. 북한의 권력층들에게만 강물은 멈췄고 세상은 그대로다.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묘수가 없는 사회라는 컨센서스의 발로이건 미친 권력 군상들의 우격다짐이건 그들의 세습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는 '완전히 딴 세상 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겨우 지탱하고 있는 나라가 아프리카 외딴 분쟁국 처럼 불가해한 불량 국가로 인지되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3대 세습이 약간 불쾌한 뉴스일뿐 전혀 신경이 쓰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주관적 감각과 이성이 남북이 완전한 이민족으로 진화되는 흐름 안에서 자연스레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세습사건으로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면 망언일까? 젊은이가 아니라서 그런지 공연히 기분이 더럽고 모욕스럽다. 분명 감놔라 배놔라 간섭할 이유도 없는 남의 집 제사상의 잡사일 뿐인데….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