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화공과를 졸업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다 취미로 시작한 권총 사격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20대 후반의 뒤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6년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이후 1987년 베이징 아시아선수권대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 줄곧 입상권 밖을 맴돌다 사격 입문 10여 년 만인 1991년 국제사격연맹(UIT) 서울월드컵 대회에서 남자공기권총 금메달을 획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 각종 국제대회에서 2개의 올림픽 쿼터를 따내며 사격연맹이 뽑은 `올해의 최우수 선수'로도 뽑히는 등 승승장구하던 김 코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둔 1992년 봄 합숙훈련 도중 사인이 맞지 않아 표적을 갈아 끼우던 동료를 다치게 한 오발사고의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동안 사대를 떠나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사격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한 지 4년만인 1996년 대구백화점 창단 멤버로 복귀해 불혹의 나이에 각종 국내 대회에서 우승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최고령 사격 대표로 출전해 중국과 일본에 이어 남자 공기권총 단체전 동메달을 땄던 김 코치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스무살 가량 아래의 후배 이상도(32.창원시청)와 진종오(31.KT)를 이끌고 출전했다.
2003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김 감독은 지도자로 변신해 수제자 진종오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으면서 현역 시절 세계 최강 중국과 아시아 2인자 일본에 가려 '변방' 취급을 받았던 한을 풀었다.
김 코치의 조련을 받은 진종오는 대표생활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50m 권총에서 '깜짝' 은메달로 스타 탄생을 예고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50m 권총 금메달과 10m 공기소총 은메달을 거머쥐면서 세계 최고 사수로 거듭났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진종오 외에는 한 명도 결선에 오르지 못했던 아쉬움도 이번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베테랑 이상도와 차세대 주자 이대명(22.한체대)가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하면서 씻어냈다.
한국 권총을 명실상부 세계 최강으로 길러낸 김 코치의 비결은 선수들과 끊임없는 대화다. 한참 아래 연배의 제자들이지만 스스럼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도록 유도한다.
첫인상은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 때문에 다가서기 쉽지 않지만 묵묵히 뒤에서 챙겨주는 속 깊은 성격이다. 제자들도 오랜 현역 생활로 선수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는 김 코치를 두고 "뒷모습만 봐도 선수가 딴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아는 것 같다"며 전적으로 의지한다.
news@ajnews.co.kr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