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와 마초가 전설이 된 임청문
‘소화’라는 명칭은 970년 북송(北宋) 태조인 조광윤(趙匡胤)이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고을이다.
그러나 처음 쓰촨성 삼국지 유적에 대한 취재 일정을 받아 들었을 때 소화고성이라는 생소한 지명을 보고 다소 의아했다.
삼국지 어디에도 소화고성에 대한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의문은 현지에 도착한 후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서야 풀렸다.
소화고성의 옛 이름은 가맹관(葭萌關). 무릎을 쳤다.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장수 장비(張飛)와 훗날 촉한(蜀漢) 오호상장(五虎上將)에 이름을 올리는 마초(馬超)가 역사에 남을 대결을 펼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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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고성의 옛 이름은 가맹관으로 촉(蜀)으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화고성의 서문인 임청문(臨淸門) 앞 광장은 장비와 마초가 3일 밤낮을 겨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
가맹관은 파촉제일현(巴蜀第一縣), 촉국제이도(蜀國第二都)로 불린다.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역사상 처음으로 촉을 영토로 편입시킨 후 진시황이 이 지역을 가맹현으로 지정한다. 파촉제일현으로 불리는 이유다.
또 가맹관은 유비가 촉한을 건국한 후 도읍인 청두(成都)에 이어 두번째로 중히 여기던 지역이기도 하다. 촉국제이도의 유래다.
유비가 촉 정벌에 나섰을 때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유장이 한중의 장로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유비와 장로가 촉의 지배권을 놓고 한바탕 전투를 벌인 곳이 가맹관이었고 이 전투를 전설로 남게 한 인물이 장비와 마초다.
장비와 마초는 3일 밤낮을 겨뤘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결국 제갈량의 반간계(反間計)에 넘어간 마초가 항복을 하면서 유비군의 승리로 끝났다.
현재 소화고성의 서문(西門)인 임청문(臨淸門) 앞 광장이 당시 장비와 마초가 일기토(一騎討)를 벌였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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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맹관에서 벌어졌던 장비와 마초 간의 혈투는 중국인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삼국지 고사 중 하나다. 전통의상을 입은 어린이들이 장비와 마초의 흉내를 내고 있다. |
소화고성 안에는 인근 밭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부들과 이들을 상대로 생필품을 파는 상인들,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마치 거대한 주상복합단지를 방불케 한다.
성내를 둘러보던 중 소화고성의 동서(東西)를 관통하는 타이쇼우제(太守街)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닥에 깔린 돌길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가운데 길은 관리들이 다니던 길이고, 그 옆 길은 가마꾼들이 지나던 길, 제일 가장자리로 난 길은 일반 백성들이 오가던 길이라는 것이다.
봉건시대 신분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는 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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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고성 동서를 관통하는 타이쇼우지에(太守街) 전경. 바닥의 가운데 길은 관리들이, 그 옆 길은 가마꾼들이, 가장자리 길은 백성들이 각각 이용했다. 소화고성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 역사가 응집돼 있는 공간이다. |
과거 유생들이 시험을 치르던 장소인 카오펑(考棚)에서는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수단이었던 유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淸)대에만 해도 322칸에 달하던 시험방은 현재 12칸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중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 당시 반봉건 기치를 내건 홍위병(紅衛兵)들이 훼손했다고 한다.
소화고성 탐방을 마치고 나오면서 삼국시대부터 송(宋), 당(唐), 명(明), 청(淸),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까지 모두 접한 느낌을 받았다.
성 전체가 중국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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