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말 기준 국제그룹은 무역 건설 신발 기계 방직 철강 제지 금융업 등 각 부문에 걸쳐 2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매출액은 1조7913억원, 수출액은 9억3400만 달러에 달하는 당시 재계 7위 대기업이었다.
해방 이후 재계 역사상 정부가 사기업 해체를 주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47년 양정모 회장이 부산 동구 범일동에 세운 국제고무공장에서 출발한 국제그룹은 ‘왕자표 고무신’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기업이었다. 1973년 국제상사로 사명을 바꾸며 중화학, 섬유, 건설 분야 등에 진출해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세웠고, 1977년에는 연합철강과 연합물산, 연합개발, 연합해운 등 계열사를 한꺼번에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국제그룹은 바닥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결국 1985년 그룹 해체로 이어지게 됐다.
정부는 경영부실에 따른 국민 경제에 미칠 영향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지만, 재계나 국민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양정모 회장이 전두환 정부에 밉보여 그룹이 해체됐다는 것이 재계의 정설이다. 당시 재계에서는 “총선 때 국제그룹의 협조가 부족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양 회장이 폭설로 늦게 참석했다”는 등의 소문이 퍼져나갔다.
총수인 양정모 회장은 2년 후 ‘국제그룹 복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그룹 복원을 추진했다. 1993년에는 헌법재판사무소(현 헌법재판소)로부터 정부가 추진한 국제그룹 해체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쏟아진 물을 다시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죄 없이 당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며 억울함을 강조했던 양 회장은 끝내 그룹 복원을 통한 명예회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지난 2009년 3월 29일 눈을 감았다.
정부에 의해 1974년 국내기업중 처음으로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하며 수출의 날 1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던 연합철강은 이듬해인 1975년 권철현 창업주가 외환관리법 위반 및 탈세혐의로 구속되면서 1977년 회사를 국제그룹에 양도했다. 2003년 별세한 권 창업주는 생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 중앙정보부 검찰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돼 갖은 위협을 가하며 경영권 포기를 강요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소유주식을 5억원의 헐값에 양도할 수 밖에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1960~1970년대 당시 세계 최대 합판업체였던 동명목재상사는 1980년 6월 19일 새벽 창업주 강석진 회장 부자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합수부)에 연행돼 재산상태와 자금출처, 숨긴 재산과 관련한 조사를 받으며 폭언과 폭행 등 온갖 가혹행위를 받고 2개월간 감금된 뒤 군인들이 내미는 ‘회사와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났다. 가족들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부친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이렇게 해서 당시 6000억원대로 추정되는 회사의 전 재산은 부산시와 한국토지개발공사(현 LH공사)에 ‘헌납’했지만 이후 강 회장 일가족은 ‘악덕기업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억울암과 한을 품은 강 회장은 198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8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동명목재 재산 헌납 사건’에 대해 국가가 사과하고 앞으로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고 권고함으로써 고인과 가족은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강제헌납한 재산은 되찾지 못했다.
국제그룹, 연합철강, 동명목재와 같은 사례는 한국재계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정치·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업은 권력에 의해 순식간에 패망의 길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모든 책임을 권력에게만 넘길 수는 없다는 지적도 많다.
해방 후 많은 기업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와 정치권의 ‘보이는 손’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층에게 잘만 보이면 알짜 사업을 따낼 수도 있고, 경쟁사 기업을 빼앗아 올 수 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기업들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별도의 관리팀을 만들어 정부 요직 인사와 정치인들을 관리하고 대접했다. 정부와 정치인들도 이런 기업인들을 결국 자신의 돈줄, 또는 하수로 여기는 사상이 굳어졌다.
어린아이들조차 ‘정경유착’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한국사회가 된 것은 기업이 이익만을 쫓아가며 스스로 자정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재계 관계자는 “권력에 의해 성장한 기업은 권력에 의해 비참한 결과를 맞을 것을 알지만 외면만할 수 없는 게 기업이 당면한 처지다”라며 “지금도 많이 개선되긴 했으나 여전히 권력의 상황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많이 깨끗해졌다고 하지만 권력과 기업에 남아 있는 실타래는 아직도 단단히 꼬여 있어 쉽게 풀리지 않는다”며 “권력층의 생각의 전환과 더불어 기업인들도 정당한 경영을 통해 사업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키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