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창] 한국서 대기업 총수로 산다는 것

김종수 부국장 겸 산업에디터



"머지 않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를 검찰청사에서 해야 할 것 같다."

최근 얘기가 아니다. 13년전 이맘때 모 대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불만섞인 목소리로 내뱉은 얘기다.

당시 2003년 말부터 그 이듬해까지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김동진 현대차그룹 부회장, 강유식 LG그룹 부회장, 손길승 SK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 연일 검찰에 출석했다. 그때는 대선 불법자금 수사 때문이었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총수들의 검찰 소환은 되풀이됐다. 대상이 조금씩 달랐고 수사의 강도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항상 ‘돈’이 말썽이었다. 때만 되면 정치권으로부터 기업은 거액의 돈을 요구받고, 또 때만 되면 검찰에 불려가 조사받는 일을 되풀이한다.

당사자로서는 ‘돈 뜯기고 처벌받는' 것만큼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하소연한 적도 있었다. 2003년 전경련을 이끌었던 손길승 회장은 그해 11월 30일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정치자금 문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과거의 유산"이라면서 "제가 마지막 ‘희생양’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는 말을 남겼다.

손 회장의 간절한 바람은 곧 공염불이 됐다. 1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재계는 `살아있는 권력‘ 앞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었고, 다시 검찰에 줄소환돼 창피를 당하는 업보를 되풀이하고 있다. 대통령이 독대하자는데 거부할 총수는 없다. 그게 친기업적인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 대통령의 요구에 ‘노(NO)'라고 할 수 있는 총수는 더더욱 없다.

최근 기업들의 대표 단체인 전경련은 '알아서 기고' 스스로 국민의 공적(公敵)이 되고자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너무 한심하다. 미르.K스포츠재단 기금 모금을 나서 주도한 것도 모자라 입을 굳게 다문 '식물단체'로 전락하고 있다. 장본인인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한술 더 뜬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하야를 엄중히 요구하는 판국인데도 아직 자신의 거취에 대해 유구무언이다. 뻔뻔하기 짝이 없다.

13년 전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지휘하면서 추상같았던 안대희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불가항력적'이라는 표현으로 애둘러 기업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했다. 안 부장은 당시 "기업이 정치권에 돈을 건넨 것이 나쁜 관행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랬던 것도 또한 사실이 아니냐"면서 "그럼에도 수사받는 기업들을 '공적(公敵)'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기업 총수들을 두둔하자는 것은 아니다. 수사는 철저하게 끝까지 파헤치는 게 맞다. 다만 `뜯기고 처벌받는' 일을 되풀이해 당하는 기업의 입장은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나라가 혼란스럽다고 경제 활성화와 청년일자리 창출, 4만 달러 시대 달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 등의 과제를 포기할 수 없다. 이를 위한 견인차는 ‘뜯기고 처벌받는’ 주인공들이다.

향후 경제 전망도 밝지 않다. 최근 기업들의 실적이 저조한 가운데 10대 그룹조차 외형 성장이 뒷걸음질쳤다. 올해 3분기 SK그룹의 매출은 전년동기대비 3조6867억원이나 줄었고 현대중공업, 삼성, 현대차, LG, 포스코 그룹도 조 단위로 외형이 감소했다. 여기에 글로벌 경기둔화와 ‘트럼프 리스크’도 모자라 내년 4월까지 특검과 국정조사 등에 기업 총수들이 끌려다녀야 할 판이다.

이제 기업 총수들도 변해야 한다. 앞으로는 ‘시장의 심판’ 뿐 아니라 ‘국민의 심판’에 더욱 두려워해야 하는 시대임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스스로 개혁을 서둘러 ‘불가항력’이라는 ‘말 안되는 망령’에서 벗어나 공정해지고 당당해지기를 기대한다. '뜯기고 처벌받는' 악순환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야 수십만명에 이르는 기업의 임직원들이 다시 신발끈을 매고 본업에 전념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 회복의 시작과 끝이 바로 기업의 모든 구성원이지만 그 정점에 총수가 있기 때문이다.


김종수 부국장 겸 산업에디터 js333@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