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수칼럼] 공직자의 홍보 기피증과 강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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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수 초빙논설위원
입력 2018-01-0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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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육정수 초빙논설위원]

[육정수칼럼]

중견기자 시절인 1988년, 일본 외무성 초청으로 1개월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국 기자 일행의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일본 프레스센터 측은 교수 등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첫 2주일간 일본의 각 분야를 소개했다. 그 다음에는 전국 여러 곳에 배치된 자위대와 주일미군 기지들을 취재할 수 있게 했다.

첫날 프레스센터 측의 초청 이유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분들을 친일파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일본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취지로 마련한 것입니다.”

30년 전에 들은 이 말이 어떤 조직에서든 지금도 유효한 홍보의 대원칙이 될 만하다고 믿는다. 그 무렵 우리나라 정부 및 공공기관, 기업체 등에서는 홍보를 뜻하는 PR(public relations)이란 단어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린다’는 뜻으로 통용되는 게 일종의 상식이었다. 주로 방어적 의미를 담아 불리한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만 전달한다는 뜻으로 통했다.

그러나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이런 식의 전근대적 홍보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인식이 상당히 확산된 것 같다. 심지어 조직 내부에서조차 거부반응이 커지고 있다. 언젠가는 거짓임이 들통 나서 조직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치권은 아직도 옛날에 머물러 있는 양상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 추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끊임없는 세뇌 전략의 홍보효과를 과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즉, 운동권적 사고방식에 그대로 젖어 있는 것 같다.

우선 과거 정부의 못마땅한 부분에 관해 각 기관의 보관 기록을 샅샅이 뒤져 ‘적폐 청산’ 작전의 홍보자료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런 방법은 상당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지지와 홍보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더 부패했을 수 있는 지지층에 대해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고 방관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문성 부족과 이념적 문제에 대해 많은 지적이 있음에도 개선하려는 노력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마추어 티는 벗지 못한 채 오만함은 치솟고 있다.

현대적 홍보 마인드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최근의 대표적 사례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특사방문 건이다. 그 2박3일의 미스터리가 20여일이 지나 해가 바뀌도록 풀리지 않고 있다.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임 실장 본인은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대통령과 외교부장관, 그리고 임 실장의 방문 직전 먼저 UAE를 다녀온 국방부장관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새해 초에는 UAE의 원전사업 총책임자의 방한 소식도 있어 원전 건설 차질을 둘러싼 문제로 추측될 뿐 여전히 안갯속이다.

정부 측은 “양국관계를 지금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서 ‘전면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한 단계 격상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될 것”이라는 선문답(禪問答)만 되풀이한다. 언론에는 무작정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다.
어느 나라 정부도 의혹사항이 전혀 없는 경우는 드물다. 선거와 정치, 외교, 군사 등 분야에서 진실을 감추거나 거짓 해명으로 국민의 불신을 사는 사례가 종종 도마에 오른다. 그러나 투명한 설명으로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정권 자체가 위기에 몰릴 수도 있다.

공산 국가나 1인 독재체제와 달리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권력분립과 언론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 등에 의해 정권이 마냥 의혹을 뭉개면서 버티기는 어렵다. 우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과정에서도 이미 뼈저린 교훈을 얻은 바 있다.

문재인 정부도 전직 대통령 탄핵을 통해 집권한 정권인 만큼 전 정권의 쓰라린 경험을 남의 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과거 정부의 잘못들을 억지로 들춰내 반사적 이익을 보려는 모습은 저급한 홍보 전략일 뿐이다. ‘적폐 청산’ 문제를 적정선에서 이성적으로 조절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현 정권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한국정책방송원(KTV)이 문 대통령의 제천 화재참사 현장 방문을 홍보 소재로 삼은 것 역시 과잉이었다. 문 대통령의 애칭을 딴 ‘이니 특별전’으로 홈쇼핑을 상품화한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이 묵묵히 돌아오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보좌관의 말을 인용해 칭송했다.

또 청와대가 최근 미국의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diplomat)’에 실린 문 대통령 풍자 칼럼을 찬사로 잘못 번역해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망신당한 것도 대통령 홍보 강박증의 한 사례다.

장관과 검찰, 경찰의 수뇌들도 홍보 강박증의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연말 법무부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 등 4명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을 함께 보고난 뒤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논평까지 내고 일부는 관람 중에 훌쩍이기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밖에 청와대가 최근 ‘탄저균 백신 수입’ 관련 보도 건에 대해 인터넷 매체를 경찰에 수사의뢰한 것도 정부답지 못한 이례적인 일이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설명해 정정보도를 요청하면 시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을까.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사항은 알 권리 차원에서 충분한 홍보를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통령, 장관 등 고위 공직자들이 당연히 해야 할 통상적 업무를 생색내는 홍보 대상으로 삼는다거나 시류에 영합하는 홍보에 신경 쓰는 행위는 바른 자세로 보기 어렵다. 그런 공직자는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품격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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