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김호이의 사람들>의 발로 뛰는 CEO 김호이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몇 개의 직업을 가지고 계신가요?
이번 인터뷰는 서울인문포럼 이사장, 그리고 삼성생명 파이낸셜 컨설턴트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글로벌미래인재개발원장에 이어 지난해에는 중앙일보에서 <배양숙의 Q>라는 인터뷰 코너를 맡았었던 배양숙 서울인문포럼 이사장의 인터뷰입니다.
Q. 작년7월부터 11월까지 중앙일보 <배양숙의 Q>라는 코너를 하시면서 뇌과학자 정재승교수님, 마린보이 박태환 수영선수, 로봇다리 세진이의 어머니이신 양정숙씨, 배우 차인표 등 총 17명의 국내 외 각계각층의 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언론사 인터뷰어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A. 작년 6월경 중앙일보에서 한 기자분이 저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전략 콘텐츠팀에서 새로운 기획을 하는데 외부필진으로 참여를 해주시면 좋겠다기에 상세한 내용을 들어보니 100세 시대를 살아가면서 ' 어떻게 해야 더, 오래 잘 살 수 있는가?'를 주제로 각 분야 전문가들의 생각을 외부 필진의 기고 형식의 콘텐츠였어요.
저의 비즈니스가 삼성생명 재무설계사이니 은퇴 후 재무 설계나 위험보장 관련된 전문가로서 기사기고를 정기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기획이 시의 적절하고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장수시대에 돈, 건강 등등 삶의 전반적인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더 잘 사는가?' 돈, 성공, 명예가 있다고 해서 꼭 잘 사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지요.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테니 독자들에게 큰 의미가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참여하겠다 했는데 재무 설계사로서 전문적인 부분을 담당 할 수는 있겠지만 재무설계사면 누구라도 할 수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주변의 각계각층 리더분들을 섭외해서 집중인터뷰를 통해 인터뷰이 한분 한분의 삶을 심도 있게 조명하고 100세 시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라는 공통 질문을 통해 잘 사는 삶에 대한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고 개인들이 스스로 가꾸어 나가는 것임을 알고 스스로 답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의 명함으로 오랜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주변에 인품이 훌륭하시고 전문성이 깊은 각 분야 리더분들이 많이 계셔서 인터뷰이로 초대할 수 있었어요.4개월 동안 매주 7천자 ~1만자 인터뷰가 디지털과 지면으로 기사화 되었어요.
그런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지요.
전략 콘텐츠 팀<더 ,오래>라는 콘텐츠에 소속되어 <배양숙의Q> 라고 직접 제목을 지었어요. 인터뷰의 방향성을 정했고 인터뷰이 섭외도 당연히 제가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작년 초여름에 시작해 초겨울까지 4개월 동안 매주 전쟁을 치루 듯 기사 출고를 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던 12월 어느날에 중앙일보 측에서 저한테 메시지가 왔는데 <더 오래>가 기획 기사 부분에서 전 언론사 1등을 했다는 거예요.
<배양숙의 Q>가 1등 공신 이었다고 편집 국장님께서 감사의 뜻도 보내주셨었지요.
Q. 배우 차인표,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 ,정재승 교수 등 대부분 만나고 싶어서 바빠서 못 만나는 분들과 인터뷰를 많이 진행하셨는데 섭외는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A. 어떤 자리에서 기자 분들 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인터뷰에서 섭외가 쉽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섭외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되었어요. 사회공헌을 위한 비영리로 운영한 1년 과정 인문학프로그램인 '수요포럼인문포럼'과 스무여명의 국내외 연사분과 1000여명의 청중들이 함께하는 서울인문포럼을 개최했었기에 이미 많은 각계 각계각층의 리더 분들과 오랜 시간 연결이 되어있었으니까요.
또 직접 아는 분이 아니라도 한 사람만 건너가면 바로 섭외가 가능하기도 했지요.
긴 시간 비즈니스를 하면서 사회 공헌을 지속적으로 실행해왔기에 배양숙 이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는 입장에서 섭외를 하니 일정만 맞으면 대부분 흔쾌히 응해주셨고 특히 정재승 교수님 같은 경우는 인터뷰 요청을 할 당시에 <알쓸신잡>방송 출연 등으로 무척 바쁘신 상황이기도 했고 섭외가 잘 안 되는 분으로 인식되어 있었어요.
당시 언론에서 인터뷰 할 때는 학자로서가 아닌 <알쓸신잡>에 대한 이슈로 인터뷰 요청을 했던 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해요.
그렇지만 저는 교수님께 “학문적으로 학자, 교수. 과학자로서 정재승 교수님에 대해 인터뷰를 하겠다” 하지만 “<알쓸신잡>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안할 수는 없다“
“7000자 ~1만자 인터뷰 중 일부분은 들어가겠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저는 학자로서의 삶을 전하고 싶습니다” 라고 해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어요.
물론 정재승 교수님과는 한국뉴욕주립대학교 특강 요청 관련으로 소개를 받아서 먼저 인연이 있었는데 마침 <배양숙의 Q>를 시작하게 되어 바로 연락을 드릴 수 있었답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님은 다음에 개최될 서울인문포럼에서 예술분야의 연사로 섭외하려고 2015년부터 진행을 해왔던 터라 바로 인터뷰요청에 응해주셨어요.
작년 6월경 섭외 전화를 드렸더니 9월에 ‘베토벤 소나타’ 전 곡을 10년 만에 다시 연주하시는 빅 이슈가 있었기에 시의 적절한 인터뷰를 하게 되었어요
결국 인터뷰이 분들과의 인연은 <서울인문포럼>, <수요포럼 인문의 숲>, <한국 뉴욕주립대학교> <삼성생명보험>등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분들이거나 소개가 된 분들이지요.
Q. 지금까지 인터뷰 했던 인터뷰이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이나 이야기가 있나요?
A. 어느 한 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라고 얘기는 할 수가 없어요 .한 분 한 분이 다 의미있는 분들이고요.
그 분들 삶 자체가 특별하신 분들이지요.
그렇지만 제가 인터뷰이 섭외를 하기 전에 '이분을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어요.
첫 번째로 '인터뷰이의 메세지가 현재 이 사회에 의미있는 동기부여를 해주실 분인가? ' '그 분의 삶에서 지금 어떤 이슈가 있으신가? 그 이슈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세지가 있는가>' 그런 과정을 통해 인터뷰이를 초대했어요.
로봇다리 세진이의 어머니 양정숙 씨 같은 경우는 두 다리가 없는 아기 세진이를 입양해서 잘 키워서 IOC위원까지 꿈을 꾸는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잖아요?
양정숙 씨를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작년 강서지역에서 장애시설이 혐오시설이라고 설립 반대를 하는 일들이 있었어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그 뉴스를 접하고는 너무 안타까웠어요.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인식이 이젠 선진화되어야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요.
작년 8월에는 미국 일정으로 10일간 출국했어야 했어요.
8월 8일 노암 촘스키 교수님과의 미팅약속, 그리고 LA로 가서 한국의 오드리 햅번이라 생각했던 신애라씨와의 인터뷰, JFK에 착륙하자마자 스탠포드대학교 폴 김 부학장님을 급히 섭외했고, 보스턴으로가 월든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관계자 인터뷰를 할 계획이 있었어요.
출국 전에 양정숙씨와는 전화통화로 미리 섭외가 되었고 귀국 후 9월에 인터뷰를 하고 10월에 기사가 나가게 된 거지요.
비하인드 에피소드가 있는데 양정숙씨는 9월에 인터뷰를 하고 10월 첫째 주에 기사가 나가야 하는데 장사익 선생님이 광화문 광장에서 12만명의 청중과 추석 맞이 아리랑페스티벌 공연을 하신다고 하시는 거예요.
행사 이슈로 부득이 장사익 선생님 기사가 먼저 나가면서 기다리는 동안 가수 고 김광석 씨 부인 서해순 씨 입국이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었잖아요?
장애인이었던 딸 사망 사건이 다시 거론되면서 더 큰 파장을 낳았지요.
그즈음 양정숙 씨 기사가 나갔었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엄청 나더군요.
거의 20만뷰가 기록이 되었어요.
수많은 댓글을 보면서 뭉클해지기도 했어요.
사실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깜짝 놀랐었고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어요.
독자들의 관심을 보며 장애우와 그 가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으리라 생각해요.
이 지점에서 인터뷰어로서 사명감을 느끼게도 되었지요.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긴 합니다.
미국 일정 중 몇 가지 변수도 기억에 두고두고 남긴 합니다.
뉴욕에 도착했는데 MIT 노암 촘스키 교수께서 약속을 일주일 뒤로 미루어 달라는 메일이 왔었어요.
그 날짜엔 LA 얼바인에서 신애라 씨와의 인터뷰와 다음날 스텐포드대학교에서 폴김부학장님의 인터뷰가 약속되어있어 부득이하게 귀국 후 인터뷰를 하기로 했지만, 귀국 후에도 신상에 중요한 일이 있어 인터뷰를 하실 수 없게 되었다고 답 메일이 도착이 되었었는데 그로부터 한달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62년간 MIT에 계시다가 아리조나 대학교로 이동하시는 중요한 결정을 하셨던거예요.
또 스탠포드대학교에서 폴 김 교수님 인터뷰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LA공항으로 이동해서 JFK행 탑승을 하고 도착해서 보스턴행 기차를 타야 했었는데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연착이 되어 LA공항에서 터미널과 터미널 사이를 뛰어다니다 휴대폰을 도난처럼 분실해버렸지요.
모든 연락처와 자료들이 없어져서 결국 보스턴 행 기차를 타지 못했고 월든에서의 헨리데이비드 소로우 탄생 200주년 기념 관계자 인터뷰도 하지 못했답니다.
또 노암 촘스키 교수님의 인터뷰를 못했기에 부득이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 보이스코치이자 배우인 이진선 씨의 기사를 급히 내보내야 해서 뉴욕의 딸아이 좁은 방에서 새벽까지 기사를 고치고 또 고쳐 겨우 출고를 하는 일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대신 나간 이진선 씨의 인터뷰 기사가 9만 조회를 기록했어요.
변수가 낳은 기적 같은 일이었지요.
그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획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자는 교훈을 줍니다.
변수가 때로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기도 하니까요. 물론 변수를 만나 포기해버리면 안되고 차선이라도 열심히 실행했을 때입니다.
당연히 다음 기회에 아리조나 대학으로 노암 촘스키 교수님을 뵈러 갈거예요.
아마 아주 환대해주시리라 생각됩니다.
더 탄탄한 인터뷰를 할거예요. 꼭
월든에도 다시 갈거예요.
그때 그 일이 안 되었던 건 시간이 지나 더 단단하게 마무리되기 위해 일어난 일 인 경우임을 저는 여러 경험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답니다.
Q,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거절 같은 건 당한 적은 없었나요?
A.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던 경우는 있었어요.
역시 작년 8월 경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책이 나온다고 해서 인터뷰 섭외 요청을 했었어요.
섭외를 했을 당시엔 강수진씨가 공연을 마치고 바로 출국을 해야 했고 이어서 저도 미국 일정으로 출국을 해야 했기에 제가 귀국해서 바로 인터뷰를 하기로 담당자와 통화를 했었어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강수진 씨 인터뷰 관련 질문을 생각하며 15시간 비행을 했지요.
귀국하니 하루 전에 이미 다른 기자 분이 인터뷰를 했더군요.
솔직히 많이 아쉬웠습니다.
1만자 인터뷰에 들어가야 하니 아주 정성 들여 다각도로 준비한 질문들을 할 수 없게 되어 무척 안타깝기도 했지요.
앵커 백지연 씨는 사전에 인터뷰를 요청할 당시는 세계 여행을 하고 계시다고 귀국하면 연락을 주시기로 했는데 제가 LA공항에서 휴대폰을 분실을 했었어요. 모든 연락처와 서류들이 휴대폰에 저장되어있었지요.
휴대폰과 함께 천 개의 연락처 사진 등 모든 자료들이 사라졌으니 백지연 씨의 연락처도 없어졌지요.
위에서 언급했던 MIT 노암 촘스키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지난해 8월8일 MIT에서 만나 뵙기로 사전에 미리 메일을 주고받았음에도 노암 촘스키 교수님께 중요한 일이 같은 시기에 생겼어요 .
너무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보스턴을 떠나시게 되었고 일주일 후에 다시 약속을 잡자고 그랬어요,
그 사이에 저는 LA와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인터뷰를 두 개를 하고 다시 뉴욕에 들어왔더니 “개인의 신상에 큰 변화가 생겨서 너무 미안하지만 지금 인터뷰는 할 수가 없겠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그때는 영문을 몰랐어요
세계적인 석학들이 약속을 하고 취소를 잘 하지 않거든요, 보통 그런 경우는 무슨 큰 일이 있는 건데 알고 봤더니 MIT에 62년을 근무 하셨는데 갑자기 아리조나 대학으로 이동하시게 된 일이 같은 기간에 발생한 경우죠.
인터뷰 거절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변수로 인해 인터뷰를 하지 못한 상황도 있죠.
또 재미있는 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씨를 인터뷰 하고 싶었었어요.
그분과 한국의 무라카미 하루키 씨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계신 장석주 시인님과 대담 인터뷰를 하면 좋을 것 같아 사전 조율을 한 후 귀국해서 해당 출판사 대표님과 통화를 했더니 그 사장님이 막 웃더라고요.
동일한 기획으로 다른 기자 분이 요청을 했다는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황했어요. 해서 안하게 되었지요.
요청을 해서 그런 변수들이 있어서 못한 적은 있지만 거절을 당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아왔던 배양숙 이라는 사람의 흔적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언론사 기자는 아니지만 요청했을 때 대부분은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는거죠.
또 이미 출고된 기사들을 보시고는 “아 이런 방향으로 인터뷰를 했구나”를 알 수 있으니까 응해주시는 것 같아요.
가끔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요.
'저를 인터뷰 해주세요' 하고 메일을 보내시기도 하던데 물론 인터뷰이를 선정하는 것은 그때 그때의 상황과 방향성이 맞아져야 합니다.
물론 제가 섭외하고 질문해서 기사화 되는 것이지만 중앙일보라는 매체를 통해 기사화 되니 신뢰도가 더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인터뷰를 보시면서 어떠한 생각이 드셨나요?
저 역시도 인터뷰를 하며 수많은 거절 등을 당하고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경되어 인터뷰를 못하게 된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감 되는 부분들이 매우 많았는데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여러분 모두, 인터뷰의 독자에서 뿐만 아니라 '인터뷰어'로서의 간접적인 시각을 통해 삶을 내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부도 기대해주세요!
-김호이의 사람들-
인터뷰/ 기사작성 및 수정 : 김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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