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34)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 공휴일궤(功虧一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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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칼럼니스트
입력 2025-01-2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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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칼럼니스트
[유재혁 칼럼니스트]
 

기원전 1046년, 주 무왕(武王)이 향략과 방탕에 젖은 상(商)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통일했다. 서쪽에 있는 오랑캐 나라 여(旅)에서 오(獒)라고 하는 개를 공물로 바쳤다. 키가 넉 자나 되고 사자를 닮은 이 개는 사람의 말귀를 알아들을 만큼 영특했다. 진기한 동물을 상납받은 무왕이 크게 기뻐하며 애지중지했다. 이를 지켜보던 동생 소공(召公)이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면 뜻을 잃는다"고 염려하며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嗚呼夙夜罔或不勤(오호숙야망혹불근)
不矜細行終累大德(불긍세행종루대덕)
為山九仞功虧一簣(위산구인공휴일궤)

오호라, 낮이나 밤이나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되나니
사소한 일에도 신중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덕에 누가 되리
아홉 길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공이 무너진다네.

소공의 말인즉슨 이렇다. "군주는 아침부터 밤까지 덕행을 생각해야 하고, 소소한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큰 덕은 작은 덕이 쌓여서 이루어집니다. 아홉 길 흙산도 부족한 흙 한 삼태기가 더해지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습니다."

나라든 기업이든 창업 초기에는 모든 게 불안정하다. 사소한 것에 의해서도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창업보다 어려운 게 수성이다. 소공은 왕에게 그점을 일깨운 것이다. 이 고사에서 성어 '공휴일궤(功虧一簣)'가 유래했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 '다 된 밥에 재 뿌린다' 등의 우리 속담과도 통한다. 

국격이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초고속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찬탄을 받던 나라가 전세계의 구경거리가 됐다. 거야 민주당의 막가파식 의회독재와 이를 참지 못한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 발동이 본편이라면, 절차적 정당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체포 시도와 대통령의 버티기는 '국격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속편이다. 지난 15일 공수처의 체포영장이 집행됨으로써 속편은 막을 내렸지만, 전세계로 실시간 중계되는 이 국격 추락 드라마는 초유의 현직 대통령 구속과 법원 난입 사태 등 3편, 4편으로 계속 이어질 태세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여긴다. 태어나 보니 선진국이더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개발도상국, 조국 근대화 같은 말은 생경하다. 대한민국은 과연 선진국인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뒤쳐진 근대화를 따라잡기 위해 용틀임하는 개발도상국이었다. 봄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할 만큼 식량이 부족해 밥 문제 해결이 국가적 급선무였다.

'잘 살아보세'란 일념으로 수십 년 경제개발에 매진한 결과 중진국이 되어 밥은 먹고 살게 된 80,9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이것저것 쇼핑할 게 많아 귀국 시 짐꾸러미가 묵직해지기 일쑤였다. 미국의 대형 마트 전자제품 코너의 목 좋은 곳은 일제가 차지했고 삼성, LG 등 한국산은 진열대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남아도는 쌀 처리에 농촌은 골머리를 앓았고, 영양 과다 섭취로 인한 비만을 걱정하는 사회가 됐다. 해외에서는 한국산 제품이 명품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외국에 나가도 술 같은 몇몇 기호품 외에는 사가지고 올 게 없어졌다. 웬만한 건 국내에서도 다 만들고 있고 또 더 낫기 때문이다. 그 무렵부터다. 우리가 예전의 우리가 아님을 인식한 게. 

세계 10위권 경제규모와 더불어 K팝, K드라마, K푸드 등 최근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K컬쳐는 우리나라의 대외 이미지를 선진국 수준으로 고양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세계의 10대와 20대들에게 K컬쳐의 본산 한국은 트렌드의 최첨단을 걷는 나라다. 예전에 우리가 뉴욕, 파리, 도쿄를 동경했듯 이제 서울이 세계가 동경하는 도시가 됐다. 시내 곳곳에서는 관광객의 물결이 넘쳐난다. 평일 낮에도 명동을 가득 메운 인파의 대부분은 외국인들이다. 경복궁 인근과 서촌, 북촌 등지에서 개량 한복을 입고 행복한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외국인들을 보노라면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욱일승천하는 우리의 문화 역량에 대한 글로벌 공인인증서다.

비단 K컬쳐뿐인가.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부단히 실력을 쌓은 방위 산업은 이제 K방산으로 명명되어 많은 나라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 오류를 극복하고 다시 정상궤도에 오른 K원전도 수출 역군으로 자리잡았고, "한국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트럼프의 한 마디에 K조선도 포효하기 직전이다. 대한민국의 격이 달라졌고 체급이 올라갔다.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판별하는 전문가적 기준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선진국 진입의 9부 능선에 올랐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정치가 문제다. 증오와 극단의 후진적 정치문화가 블랙홀처럼 모든 걸 집어삼킨다.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처음으로 한국이 후진국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한류팬들의 실망감이 외신을 타고 전해진다.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해결책이 안 보인다"고 짚은 BBC의 논평에서는 1951년 영국 ‘더타임스’가 당시 한국의 혼란한 정치상황을 전하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혹평한 흑역사가 오버랩된다. 정치가 4류라고 일갈한 이건희의 30년 전 북경 발언이 여전히 유효한 현실은 참담하다. '정치 선진화'라는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우리가 지난 반 세기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게 생겼다. 

너도나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87체제'가 수명을 다했다고. 개헌을 하고 선거법을 바꿔야 한다고. 정치판 물갈이를 해야 한다고. 시스템을 바꾸든 사람을 바꾸든 바꿔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니 뭐든 바꾸자. 바꿔서 정치가 더 이상 나라와 사회에 민폐가 되지 못하게 하자.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못하게 하자.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는가. 정치가 제 몫을 하는 날, 비로소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마지막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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