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조선업 재건을 위해 다른 국가에 첨단 선박을 발주할 수 있다고 밝힘에 따라 국내 조선업체가 이지스함을 필두로 하는 미국의 첨단 선박 건조를 맡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선 두 회사의 특수선 독에 여유가 있는 만큼 1년에 최대 8척의 이지스함을 생산·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미국 함선 건조시장이 개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관련 기술·인력 확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업 마진이 상대적으로 낮은 선박 유지·보수·정비(MRO)와 달리 이지스함 등 첨단 선박 건조는 조선업계 매출·영업이익 확대를 위한 큰 기회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미국 조선업을 재건할 것"이라며 "법안 개정이 필요하지만 미국과 가깝고 조선 실적이 훌륭한 다른 나라에서 최첨단 선박을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미국과 가까우면서 조선 능력이 우수한 국가란 한국과 일본을 말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 유선 통화에서도 양국 조선 협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이는 미국 조선업 붕괴로 인해 중국의 태평양 전력 확장을 견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해결하려는 아이디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군 함정 확충에 2054년까지 최대 1조 달러를 투입해 전략상선단을 현재 70대에서 250대로 확대한다는 포부를 드러낸 바 있다. 2030년까지 400척 이상의 현대식 수상 전투함을 배치하겠다는 중국 계획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를 지원하기 위한 해양 지배력 회복 행정명령에도 최근 서명했다.
하지만 미국 조선업은 높은 인건비와 제조역량 후퇴로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을 온전히 뒷받침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 군사매체 아미리코그니션에 따르면 1960년 5만여 명이었던 미국 조선업 관련 인력은 현재 1만명 이하로 감소했고, 미국 내에서 이지스함을 건조할 수 있는 양대 기업인 제너럴 다이내믹스와 헌팅턴 잉걸스의 조선소 총 건조량은 미국 해군이 중국 견제를 위해 요구하는 최소 수량인 3척에도 미치지 못한다. 두 회사의 연간 건조량은 알레이버크급 구축함(9800t) 기준 1.6~1.8척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등 조선 능력을 온전히 보유한 한국 기업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달 열린 세종대왕함(7600t) 인도식에서 미국 이지스함 사업 수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정우만 HD현대중공업 특수선사업부 상무는 "현재 특수선사업부의 구축함 전용 독만 해도 알레이버크급 구축함급 이지스함을 매년 1척 이상 생산할 수 있다"며 "미국과 해양방산 협력이 본격화되면 연 5척까지 건조할 수 있고 더 확장할 여력도 있다"고 밝혔다. HD현대중공업은 자체 이지스함 설계·건조 능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이지스 전투체계까지 통합할 수 있는 전투체계통합팀을 운영하며 미국 이지스함 건조 시장 개방에 대비하고 있다.
한화오션의 이지스함 건조 능력은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업계에선 미국 시장이 개방될 경우를 대비해 연 3척을 건조할 수 있도록 건조 역량을 확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화오션은 지난달 미 해군 군수지원함 '월리 시라'호의 MRO를 6개월 만에 마무리하며 미 해군 MRO 사업 관련 물꼬를 텄다.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에 민간 선박과 함정 건조를 요청하려면 미국 선박의 해외 건조를 막고 있는 '존스법'과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을 각각 개정해야 한다. 자국 함정을 해외에서 건조하는 데 일부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패권 경쟁국인 중국 견제를 위해 동맹국에서 함정 건조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크다. 실제로 지난 2월 마이크 리, 존 커티스 등 미 공화당 상원 의원 주도로 미 해군 군함 건조를 한국 등 동맹국에 맡길 수 있게 하는 '해군준비태세 보장법' 등이 발의된 상황이다.
때문에 미국 함정 건조시장 개방은 시간 문제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변수가 있다. 미국 정부가 시장 개방과 함께 미국 조선소 시설에 대한 투자를 함께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지난해 12월 발의된 미국 의회에 발의된 '미국 번영·안보를 위한 조선업 및 항만시설법(쉽스법)'에는 외국 기업이 미국 내 조선소에 투자할 때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미국 함정 건조 자격을 주는 대가로 미국 내 투자와 인력양성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대미 투자에 대해서는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간 전략 차이가 있다. HD현대중공업은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와 '함정 동맹' 체결하며 간접 투자 전략을 취하고 있다. 양사는 각자 보유한 함정 건조 분야 전문성과 역량을 결합해 선박 건조의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건조 비용과 납기를 개선하기 위한 노하우와 역량을 공유하기로 했다. 인공지능과 로봇을 활용한 디지털 조선소 구축에도 속도를 낸다. HD현대중공업이 간접적인 투자 전략을 택한 이유로는 미국 내 조선소 건립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데다가 미국 내 숙련 인력도 크게 부족한 것 등이 꼽힌다.
한화오션은 미국 내 조선소 투자에 적극적인 입장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1억 달러를 들여 인수한 미국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에 인수액을 넘어서는 금액을 추가로 투자할 방침이다. 미국 내에서 조선소를 운영 중인 호주 조선사 오스탈 지분 9.9%를 매입해 1대 주주에 올라서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지정학적 요구과 사업 규모에 맞춰 한국·필리핀과 미국 내 조선소를 번갈아가며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