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 돈이 없다.” 40대 직장인 A씨는 수도권 20평대 아파트에 산다. 맞벌이지만 매달 200만원 가까운 대출 이자를 낸다. 아이 학원비와 식비를 제하고 나, 저축은커녕 외식 한 번도 망설여진다. 그는 “요즘엔 집에서 외식, 나들이 얘기를 쉽게 꺼내기 어렵다"며 "주말이나 연휴에도 그냥 숨만 쉬고 조용히 지낸다"고 말했다. 이 조용하다는 말은 무섭다. 소비가 침체되고, 기대가 사라진 사회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식고 있어서다.
A씨 이야기는 대한민국 중산층의 현실이다. 소비자심리지수는 넉 달째 기준치(100)를 밑돌고, 자영업 폐업률은 5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2024년 한 해에만 자영업자 87만명이 문을 닫았고, 청년 체감실업률은 20%를 웃돈다. 주거비와 교육비에 짓눌린 가계는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고, 내수가 얼면 생산도 고용도 함께 식는다. 국민의 삶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여전히 ‘이념’을 말한다. 정권 교체냐, 정권 수호냐는 프레임도 그대로다. 그러나 민생은 이념이 아니라 장바구니와 통장잔액으로 평가된다. 밥값, 월세, 학원비 때문에 힘들다는 국민이 많다는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일 수 없다. 차기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경제 살리기여야 하는 이유다.
차기 정부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업과 가계에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다. 예산의 재배치와 규제 완화, 노동시장 개혁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예컨대 전기료 인상으로 압박받는 중소 제조업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선 에너지 비용 보조나 탄소세 유예 같은 단기 처방과 함께 친환경 설비 전환에 대한 장기 금융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자산 격차 해소를 위해 보유세와 양도세 체계를 합리화해야 한다. 청년 주거 안정과 관련된 공공임대 확대 같은 구체적 분배 정책도 뒷받침돼야 한다. 단기 대책만으로는 심리 회복이 어렵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함께 주어져야 소비는 다시 살아난다.
정치권이 이 과제를 가볍게 보면 민심은 냉정하게 돌아선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실물경기 침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정부는 이후 모든 선거에서 참패했다. 반대로 1998년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 재건에 집중한 정부는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며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정치적 유불리를 앞세우다 기회를 놓치면 국민은 그 정권을 반드시 심판한다.
지금은 ‘사회통합’이 아니라 ‘경제회복’이 통합을 이끄는 시대다. 경제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이상 정치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여야를 막론하고 차기 정부는 경제 전권형 내각이라도 구성해야 한다. 정책은 실험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다. 유권자가 진정 바라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 자본이 생기는 것이다. 말이 아니라 숫자로 증명되는 정치, 성장이 아니라 삶의 회복이 먼저다.
소비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집안의 침묵. 그 침묵을 말로 바꾸고 숫자로 바꾸는 일, 그것이 차기 정부의 존재 이유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내걸었던 선거운동 문구 "It's the economy, stupid(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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