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위기에 처한 석유화학 산업을 살릴 뚜렷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국회 주도로 역대 최대 위기에 처한 석화산업을 살리기 위한 특별법과 지원 정책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석화는 철강과 함께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양대 축이다. 비닐·플라스틱을 필두로 석유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화학 제품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미국·중국·유럽·일본 등 전 세계 주요 국가는 국가 차원에서 자국 내 석화산업을 육성·관리하고 있다.
한국 석화산업은 2017~2018년 중국발 수요 확대로 엄청난 반사 이익을 누렸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함에 따라 석화 수요가 급증했고 이를 가까운 국가인 한국에서 수입해 충당했다. 산업 성장에 대한 기대감에 많은 석화업체가 생산설비 확충을 위한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석화 자립을 외치며 자국 내 석화업체에 대한 금융투자와 정책 지원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면서 중국에서 생산되는 기초유분이 급증했다. 결국 공급과잉으로 인해 범용 석화 제품 가격이 급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기초유분은 2022년 이후 3년 넘게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를 보는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과거 원유를 수출하는 데 만족하던 중동 국가들이 직접 원유 정제 및 석화 제조 설비 확충에 나서면서 공급과잉이 한층 심화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즉 현재 한국 석화업체들은 시장원리에 따라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는 게 아니다. 중국·중동 정부를 상대로 싸워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산업이라면 기업들이 공급과잉에 따른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생산량을 줄이면서 제품 가격이 회복되고 기업들이 다시 흑자로 전환하는 사이클(순환) 구조를 띨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재 석화업계 상황은 전혀 다르다. 전문가들은 중국과 중동 국가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불황이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측한다. 중국은 석화산업 패권을 쥐기 위해 대규모 적자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며 타국 석화업체들을 말려 죽이려 하고 있다. 중동 국가들은 초과 생산된 원유를 산하 석화업체에 할당해 가격 경쟁력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다.
중국·중동이 스탠스를 바꾸지 않는 이상 석화업계에 호황은 더는 오지 않을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를 의식한 듯 신용평가사들은 지난 6월 일제히 국내 주요 석화업체들에 대해 신용등급을 낮추고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내렸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업체들끼리 긴밀히 논의하며 과도하게 투자된 생산 설비를 통폐합하고, 기초유분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감축해야 한다. 해외 생산량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국내 생산량과 내수 수요가 1대 1이 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업체 간 논의는 현행법상 담합에 해당되어 금지된다. 업체들도 내수 기반으로 한두 곳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쉽사리 통폐합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산업에서 철수하는 업체들이 생산 설비를 제값 받고 팔고 싶어하는 문제도 있다.
이해관계에 따른 매듭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이다. 이를 민간 주도로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응이 늦어지면 한국 경제의 기둥인 석화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제2의 IMF급 경제위기가 올 수도 있다. 입법(특별법)과 행정(지원정책)을 꽉 쥐고 있는 이재명 정부가 나서 매듭을 단칼에 잘라낼 묘수를 짜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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