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전 국회의원]
상법 이사충실의무 개정으로 주주들에게 상이한 영향을 주는 자본거래에 대해 주주가 이사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편 이 책임이 형법 및 상법의 배임죄로 다루어지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배임죄를 완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행위가 매우 심각하다면 사기처럼 형법으로 다루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간의 사적 분쟁이므로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점에서 배임죄 완화 논의는 의미가 있다. 분쟁 해결의 목표는 민간의 다툼을 빠르게 해결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데 있다. 그런데 현재 형사 배임죄 규율이 사실상 증거개시 기능을 대신하는 점을 감안하면 증거개시절차, 즉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 도입 논의는 자연스럽다.
이런 제도의 도입에 전제가 있다. 그것은 회사의 사업 내용을 주주와 이해당사자가 공유하는 것이다. 회사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알리는 공시(Disclosure) 제도가 핵심이다. 그러면 무엇을 공시하여야 하나? 상장된 기업에 분기, 반기, 연간 재무상태표를 비롯한 재무제표를 공시하는 의무를 지우고 그 위반에 대해 엄하게 다루는 이유다. 나아가 회사의 주요한 계약과 잠재적 위험 등을 공시를 통해 주주, 이해관계자와 공유하여 회사의 경영 상태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 공시제도에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 누락되어 있다. 어떤 일(나무)에 집중하다 보면 전체(숲)을 보지 못하고 미로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기초적인, 즉 '이 일을 왜 하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회사 경영도 동일하다. '그 사업 하면 돈이 되나'는 질문을 하면 된다. 회사의 주인인 주주가 회사 경영을 맡긴 이사에게 물어 봐야 하는 것이고 경영진과 이사는 이에 대해 대답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사업으로 벌 수 있는 (예상)수익과 그 사업에 투입된 비용이다. 회사의 이사가 공시하여야 할 것은 그 사업의 비용인 것이다. 회사가 기존 사업이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회사의 비용이 얼마인지 확인하는 의미다. 예를 들어 회사가 차입(회사채)과 증자를 50:50으로 조달한다고 하자. 회사채 금리가 4%라면 주주는 그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한다. 보통 두 배 수준인 8%를 요구하는데, 이를 자기자본비용이라 한다. 채권조달은 타인자본비용으로 4%가 되고 회사의 자본비용(가중평균자본비용·WACC·Weighted Average Cost of Capital)은 6%가 되는 것이다.
이 자본비용을 공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 자본비용을 초과하지 못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 회사의 경영진은 회사의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이런 회사에 주주가 투자할 이유는 없다. 효율적으로 자본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주주에게 돌려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면 비용을 상회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면 주주는 승인하고 투자를 늘릴 것이다. 비용을 상회하는 프로젝트로 승인받았는데 달성하지 못하면 그 이유를 주주에게 설명하고 승인을 얻거나 아니면 무능한 이사라는 이유로 교체될 것이다. 회사가 분기·반기별로 공시하는 이유는 이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주주와 이해관계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일본의 밸류업 정책이 자본비용을 공시하고 자본비용을 상회하지 못하는 수익률을 보일 때(주가순자산비율·PBR·Price Book-value Ratio가 1 이하일 때) 그 개선 계획까지 공시하는 것에서 출발한 이유다. 회사의 이사 또는 경영진이 자신들이 쓰고 있는 돈의 값을 제대로 알고 그 값어치를 하는 사업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회사의 비용, 그리고 공시와 관련된 이상한 규제 완화는 시장을 왜곡하고 금융안정성을 해치고 금융소비자의 피해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상업어음(CP·Commercial Paper)의 만기 규제 완화였다. 상업어음은 원래 단기 자금조달 수단이다. 1년 이내 만기로 발행해 단기 유동성을 관리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미국은 270일, 유럽은 1년을 넘기지 못하게 하고, 한국 역시 1990년대 이후 '1년 초과는 회사채'라는 상식적 구분을 지켜왔다. 그런데 2009년 자본시장법 제정 과정에서 만기 규제가 빠지면서 기업들은 1년 이상 CP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당국은 '자금조달의 다양화'와 '시장 현대화'를 이유로 내세웠다. 코로나19 시기인 2021년 초에는 예금 기반이 없는 여신전문금융기관(카드 및 리스회사)이 최대 10년 만기인 CP를 발행할 수 있도록 명시적으로 허용하였다. 머니마켓과 자본시장의 경계가 없어진 것이다.
규제가 풀리자 장기 CP 발행은 급증했다. 2012년에는 1년 이상 CP 잔액이 50조원을 넘어 전체 시장의 절반에 달했고, 결국 당국이 뒤늦게 추가 규제를 내놓아야 했다. 2019년 41조원이던 A1 등급 CP 발행 잔액은 2021년 69조원으로 늘었고, 2022년에는 100조원을 돌파했다. 특히 카드사나 캐피털사 같은 여신전문금융사들이 2~5년 만기 CP를 대거 발행했고, 대기업도 1.5년·2.5년짜리 CP를 활용해 사실상 회사채를 대체했다. 결과적으로 회사채 발행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CP가 장기자금조달의 주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왜 기업들은 회사채 대신 CP를 선호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규제가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이사회 결의, 증권신고서 제출, 신용등급 공시, 수요예측 절차를 거쳐야 한다. 투자자에게 위험요인과 재무상태를 상세히 공개해야 하고, 수요예측에서 실패하면 금리가 높아지거나 발행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 반면 CP는 CEO 결재만으로도 발행 가능하다. 1년 미만이면 공시 의무도 없고, 1년 이상이라도 편법 구조를 통해 등록을 피할 수 있다. 신용등급도 단기 등급 하나면 충분하고, A1 등급 안에서는 우량기업과 중위권 기업이 사실상 구분되지 않는다. 기업으로서는 굳이 회사채로 시장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다.
장기 CP는 시장의 왜곡을 불러왔다. 회사채 시장의 투명한 가격 발견 기능이 무력화되고, 신용위험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A- 기업과 AA 기업이 똑같이 A1 CP를 발행해버리면 투자자는 위험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또 증권사들은 고객 자금을 단기 랩어카운트에 모아 장기 CP를 사들이고, 장부가로 돌려치기하면서 위험을 감췄다. 평상시에는 높은 수익률을 보여주지만 시장이 흔들리면 유동성이 증발한다. 결국 금융당국이 뒤늦게 개입해 검사에 나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그 피해가 투자자에게 돌아온다는 점이다. CP는 정보공개가 제한적이라 투자자가 정확한 위험을 알기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 동양그룹 사태다. 동양 계열사들은 재무가 악화된 상황에서 대량의 CP를 발행해 증권사를 통해 개인투자자들에게 팔았다. 결과적으로 4만명 넘는 개인들이 1조원대 피해를 입었다. 최근에도 증권사들이 장기 CP를 포장해 단기 금융상품처럼 판매하는 일이 벌어졌다. 2022년 레고랜드 사태 때는 CP 시장 전체가 얼어붙으며 MMF나 단기 펀드에 투자한 개인들이 불안에 떨었다. 본질적으로 단기상품이어야 할 CP가 장기로 변질되면서 만기 미스매칭과 유동성 위기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CP 등을 기반으로 채권형신탁상품이나 랩어카운트로 포장하여 유동화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금융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이런 상품들은 주기적인 만기 연장이라는 만기 불일치 리스크에 직면하고 시장이 급변할 때 시장 유동성 경색을 가져온다. 증권사들은 레고랜드 사태와 같이 금리 급변기에 손실을 덮기 위해 장부가 거래로 회사 고유자산으로 손실을 이전하거나 불법 거래를 한 사례도 많았다. IMF 위기 이후 정립된 채권시장의 시가평가 원칙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에 감독당국은 대대적인 검사를 통해 무더기 징계로 이어졌다.
CP에 대한 규제 완화는 사실상 회사채 시장과 단기자금 시장의 경계를 허문 것이었고 그 배경에는 회사의 자금조달에 대한 이사회의 결의 등 공시의무를 회피하고 주주와 이해관계자에 대해 회사의 비용을 정확히 공시하는 의무를 회피하는 길을 연 것이었다. CP는 본래 단기자금 조달 수단이다. 회사채는 장기자금 조달 수단이다. 단기와 장기를 구분하는 이 기본 원칙이 무너진 순간, 규제의 빈틈을 파고든 기업과 금융회사는 편법으로 이익을 취했고, 그 대가는 투자자와 시장이 치르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이 CP 만기를 엄격히 제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 장기 CP를 허용한 것은 ‘혁신’이 아니라 ‘착시’였고, 결과적으로 시장 신뢰를 훼손했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영진, 이사는 자금의 비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공시를 통해 주주와 이해관계자에게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 이런 기본 원칙을 망각하고 금융현대화, 기업자금조달의 다양성 제공이라는 명분의 규제 완화는 시장의 왜곡과 금융불안정성을 초래한 것이다. 금융규제의 원칙은 기본을 명확히 하는 것이 가늠자이자 출발점이다.
이용우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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