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의 타임캡슐] 찬송과 양봉, 기도와 노동을 한 곳에서··· 주인은 목사 부인 카타리나

  •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③

·황승연
[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수도사로서, 신부로서 독신생활을 해왔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수녀원에서 탈출한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는 결혼 후 그들에게 쏟아진 세상의 온갖 비난과 조롱에 당당히 맞섰다. 루터는 수도사와 수녀에게 독신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박하며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한 제도이며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은 결혼을 통해 인내, 사랑, 절제, 경건 등을 배운다’며 스스로 독신을 버림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을 실천했다.
 
루터가 결혼하고 가정을 갖기 전까지, 즉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교회가 신앙 실천의 중심이었다. 루터는 ‘신앙은 일상에서 실천되는 것이며 가정이 신앙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가정에서 주인은 루터 자신이 아닌 부인 ‘카타리나’였다. 루터는 결혼 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가 남긴 말을 보면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평온한 가정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가정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모델”이라고 했다.
 
루터와 카타리나의 가정생활
 
루터가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살았던 집은 원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었다. 이 수도원은 1504년에 세워졌는데 4년 뒤인 1508년에 루터는 무명의 수도사로 당시 ‘흑수도원’이라고 불렸던 이 건물에 입주했다. 대학교 신학 교수였던 루터는 이곳에 살면서 강의를 준비했고 종교개혁의 생각들을 발전시켰다. 1517년 그가 불붙인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이 해체되고 수도사들이 다 떠나 거의 비었을 때도 루터는 이 건물에 남아 있었다. 루터 후원자였던 작센(Sachsen)지방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가 이곳을 루터가 계속 사용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의 개혁운동을 지원하였다. 카타리나는 루터와 결혼 후 이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개조하여 가족의 안식처뿐만 아니라 지역의 유명한 하숙집으로 확장했다.
 
집안일은 대부분 카타리나가 관리했다. 루터가 사망한 1546년까지 카타리나는 가족, 학생들과 함께 이 집에 거주했다. 식당에는 40명 이상이 함께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이 있었다. 대식구이다 보니 매끼 30~40명분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루터는 가족뿐 아니라 친구, 동료, 제자 그리고 손님들과 함께 대형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고 다양한 주제로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었다. 식탁에는 늘 카타리나가 준비한 풍성한 음식과 주변에서 기막힌 맛이라 평가했던 맥주가 제공되었다. 루터에게 그녀는 동등한 파트너였다. 루터가 동료들과 신학적·학술적 논쟁을 할 때에도 그녀는 함께 참여했다. 루터의 동료 교수들은 카타리나의 라틴어 실력에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일상생활 중 식사 때나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마르틴 루터가 했던 사적인 발언들을 제자들과 동료들이 기록하여 후에 ‘탁상담화(Tischrede)’라는 책으로 남겼다. 루터의 많은 발언 내용은 주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에는 신학적 주제 외에 교황과 사제 제도에 대한 비판, 황제와 제후에 대한 평가 그리고 농민전쟁에 대한 견해가 포함되어 있으며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애정과 자녀 교육 문제와 건강 문제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루터의 인간적인 면모, 정치관, 유머, 분노, 가족에 관한 생각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카타리나는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녀가 없었으면 루터가 과연 종교개혁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했다. 농사, 양봉, 돼지 사육, 맥주 양조, 건물 관리, 아이들 교육, 가족 예배, 식사 준비, 하숙집 운영뿐만 아니라 매일 토론 자리를 준비했다. 전염병이 돌 때는 간호사 역할도 하고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 루터의 집에서는 항상 수십 명이 함께 지냈다. 자녀 6명과 고아들, 하인들, 하숙생 제자들 그리고 방문객들. 매일 대식구와 더불어 지내며 큰 집안 살림을 운영했다. 일종의 작은 기업 경영이었다. 그녀는 경영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루터의 가정은 신앙, 학문, 경제, 교육이 어우러진 개신교 ‘모델하우스’였다. 카타리나는 루터의 아내 역할을 넘어 개신교 가족문화를 최초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카타리나 이후 개신교 문화권에서는 ‘목사부인’이라는 공식적인 호칭이 생겼고 지역사회에서 여성 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가정에서의 신앙’이라는 개신교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루터는 열정적이고 유머가 넘쳤다. ‘술집에서 교회 생각해야지 교회에서 술집 생각하면 되겠느냐’는 말과 더불어 ‘맥주를 마시면 잠을 잘 자게 되고, 잠을 잘 자면 죄를 짓지 않게 되고, 죄를 짓지 않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로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 루터는 ‘하나님은 화장실에서도 말씀하시고 독일어로도 말씀하신다‘며 유머로 일상과 신앙의 결합을 강조했다. ‘아내는 남편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으니 늘 옆에 있어야 한다. 머리 위에 올라서려 해서도 안 되고, 발밑에 깔려서도 안 된다’고 했다. 카타리나 역시 유머가 남달랐다. 루터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상복을 입고 그 앞에 나타났다. 루터가 놀라 ‘누가 죽었기에 상복을 입고 나섰냐’ 묻자 카타리나는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말하면서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이토록 실의에 빠져 있을 리 없다’고 했다. 루터는 폭소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루터와 그의 부인 카타리나가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흑수도원은 현재 루터하우스라는  세계 최대의 종교개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루터와 그의 부인 카타리나가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흑수도원은 현재 '루터하우스'라는 세계 최대 종교개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타리나의 자녀 교육
 
카타리나는 수녀원에서 종합적인 교육을 받았다. 라틴어뿐 아니라 의학과 식물학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도 쌓았으며 수녀원에서 농업과 가정 경제에 대한 경험을 넓힐 수 있었다. 이러한 지식은 자녀 교육에 좋은 자산이 되었다. 카타리나는 자녀 교육에 매우 엄격했다. 자녀들에게 성경 읽기와 기도 그리고 신앙교육을 매일 실천하도록 했다. 글을 읽고 쓰는 기본 교육은 물론 인문교육을 받도록 했고 라틴어 교육과 음악 교육을 강조했다. 또 자녀들이 스스로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기술을 가르쳤다. 자녀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집안일도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배우게 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딸에게도 동일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가정 관리와 경제적 독립성을 가르쳤다. 당대 여성 교육으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카타리나 이후 아버지가 담당하던 자녀 교육은 어머니의 역할과 책임으로 확산되고 이동되었다. 루터는 모든 평범한 아이들도 학교에 가야 하고 글을 배워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가정의 목사인 모든 어머니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카타리나는 나보다 나은 교사다. 아이들이 나를 닮지 않고 내 아내를 닮기 바란다’며 교육에 있어서 아내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루터는 여섯 자녀를 두었다. 아들 셋과 딸 셋 중 넷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딸 둘은 어릴 때 죽었다. 카타리나는 자녀들이 아플 때나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매우 세심하게 돌보았고 가정이 경제적 위기를 맞았을 때도 자녀들의 건강과 교육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자녀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거짓말을 하면 루터가 놀랄 정도로 단호하게 야단을 쳤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교육 덕분에 자라서 모두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자녀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카타리나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고 카타리나가 사망하기 전까지도 친밀한 교류가 유지되었다. 루터와 카타리나의 가정은 개신교 문화권에서 모범 역할을 하면서 유럽 전역에 가정교육과 여성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역사적 귀감이 되었다.

 
루터하우스 마당에 서 있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 이 마당에 루터의 동상은 없고 카타리나의 동상만 서 있다
루터하우스 마당에 서 있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 이 마당에 루터의 동상은 없고 카타리나의 동상만 있다.
 
박물관 내부의 광고 배너에도 주인공은 카타리나였다
박물관 내부 광고 배너도 주인공은 카타리나였다.

 
루터와 카타리나의 죽음
 
루터가 사망할 때 다른 도시를 방문 중이어서 카타리나는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루터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걱정했다. 루터가 카타리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내가 만약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님께로 간다면 슬퍼하지 말고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좋은 남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녀는 이 편지를 죽을 때까지 간직하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루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카타리나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잠겨서 “내 남편은 내 영혼의 절반이었다. 그가 떠났으니 이제 나 역시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 루터가 죽기 전에 카타리나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당시에 교회법 등이 이를 허용하지 않아서 그녀는 남편 사후에 자녀들과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도 자녀들에게는 “너희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신앙”이라고 강조하며 자녀들을 끝까지 지켜내고 루터가 강조했던 신앙의 가치를 잃지 않았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6년 후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창궐했고 카타리나는 토르가우(Torgau)로 피신했다. 비텐베르크를 떠나며 “루터와 함께했던 집과 정원을 떠나려니 살아갈 힘을 잃었다”면서 슬퍼했다. 토르가우로 가는 길에 마차가 전복되면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카타리나도 사망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루터의 편지를 소중히 지니고 있었으며 “나는 천국에서 다시 루터를 만날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루터의 초상화
루터의 초상화
 
카타리나의 초상화
카타리나의 초상화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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