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①
독일은 맥주의 나라다. 독일에서도 맥주가 가장 맛있기로 유명한 도시 중 하나가 비텐베르크(Wittenberg)다. 이 도시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17년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렸던 개신교의 심장과 같은 도시다. 2017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라서 관광객을 맞이하느라 독일 정부는 도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그 후 2~3년 반짝 관광특수를 누렸으나 곧이어 불어닥친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식어버린 관광 열기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종교는 아편’이라 믿었던 긴 동독 체제하에서 비텐베르크는 관광지로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고, 가능하면 원형을 보존하려는 독일인들의 노력 덕분에 도시는 과거의 모습이 크게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방문객에게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마르틴 루터가 단골로 다녔다는 맥주집이 아직도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500년이 지나서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니! 그 술집은 관광 시즌에만 손님이 몰리는 관광용이 아니고 동네 축구 마니아들이 모여서 맥주 마시며 축구를 보고 응원하고 즐기는 꾸밈없는 보통의 동네 주막이었다. 대형 TV 모니터가 벽에 자리하고 있었고 종일 축구 채널만 켜져 있었다. 맥주집의 이름은 아들러쉥케(Adlerschänke), 말하자면 “독수리주막”. 마르틴 루터의 시대에는 이 술집의 이름이 ‘검은독수리’였다. 그 후에 ‘황금독수리‘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한다. 주막 한쪽 벽 상단에는 황금 독수리상이 예닐곱 개 남짓의 빈 테이블들을 내려다보며 독수리와 관련된 이름을 증거하고 있었다.

독수리주막의 내부, 벽에 황금독수리가 걸려있다. [사진=저자 제공]

종교개혁이 시작된 비텐베르크 성당 [사진=저자 제공]
옆집 마르크트 6번지의 호텔 겸 맥주집 바이어호프(Beyerhof)는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이자 작센(Sachsen) 지방 의원인 크리스티안 바이어(Christian Beyer, 1482~1535) 박사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법률가, 행정가로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협력한 동지였던 바이어 박사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고 법학박사를 받은 후 루터와 비슷한 시기에 교수를 지냈다. 그는 1513년부터 1526년까지는 비텐베르크의 시장을 지내면서 종교개혁을 제도화했다. 바이어 박사는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회의‘에서 루터파의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Karl V) 앞에서 낭독한 인물이다. 루터의 종교 사상을 설명하는 이 신앙고백서의 공표는 종교개혁의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바이어 박사가 마르크트 6번지의 건물을 매입하여 사용하다 1512년 화재 이후 주거용 및 상업용으로 개조하여 제법 큰 규모의 학생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1520년경 비텐베르크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건물은 단순 거주가 아니라 종교개혁, 정치, 법률, 학문적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대학의 핵심 기능을 담당했다. 마르크트 6번지와 7번지에 걸쳐서 서 있는 4층 건물과 마당은 약간의 구조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세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마당 입구에는 돌로 된 바이어 박사의 부조가 독일 전역에서도 유명한 바이어호프 맥주를 마시러 오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 건물은 1813년 나폴레옹 1세의 해방 전쟁 때 발생한 맥주집 '황금 독수리'의 화재를 제외하고는 동독 정권 시대에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 후 건물이 일부 파손되어 방치되었으나 독일 통일 후 1999년에 중세 시대의 원형을 보존한 포괄적인 개조 공사로 레스토랑과 호텔을 갖춘 맥주 양조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그 후 독수리주막과 합쳐져 운영되고 있다.
마르틴 루터 시절 ‘검은독수리’였던 맥주집 주인이 루터를 위해 맡아 놓은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위치가 어디인지는 모른다. 테이블이 많지도 않았으니 지정 자리라고 해도 특별할 건 없다. 이곳에서 맥주를 즐겼던 마르틴 루터에게 동네 사람들은 “목사가 늘 술집에 와서 맥주만 마신다”며 뒷담화를 했다. 이를 듣게 된 루터는 “아니 그럼 술집에서 교회 생각하는 게 낫지, 교회에서 술집 생각하면 되겠냐”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루터는 평소에 부인 카타리나(Katharina von Bora, 1499~1552)의 맥주 맛에 대해 칭찬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루터가 프랑스와 베니스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던 카타리나는 님쉔(Nimbschen) 수녀원에서 맥주 제조를 배웠다. 당시는 물이 오염되고 수인성 전염병이 흔할 때였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마을 전체 주민이 몰살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맥주는 일상적인 음료였고 아이들도 낮은 도수의 맥주를 마셨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맥주는 필수품이었고 따라서 맥주를 대량으로 만들었고 판매도 하였다. 사람들은 맥주가 있으면 맥주를 마시고 맥주가 없을 때만 물을 마셨다. 독일 사람들이 맥주를 물처럼 마신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며 물의 오염과 전염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대부분의 주택 소유자는 술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대부분 가정에서 맥주를 직접 만들었다.
맥주를 즐겨 마셨던 루터가 정작 사람들에게는 맥주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자주 경고를 했다. 그 자신도 맥주를 자주, 많이 마셨지만, 맥주에 중독되지는 않았다. 루터는 그의 소화불량 문제를 나움부르그(Naumburg)에서 만들어진 맥주로 치료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카타리나가 만든 맥주가 너무 맛이 있었던지 루터는 배가 많이 나올 정도로 비만이었고 통풍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맥주를 사랑했고 맥주를 맛있게 만드는 부인을 사랑했다. 루터가 맥주를 마실 때 가장 좋아했던 요리는 카타리나가 만든 완두콩을 곁들인 청어구이였다.

마르틴 루터와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 [사진=저자 제공]
루터의 부인이 된 카타리나는 5세 때 수녀원에 맡겨져 엄격한 수녀원 생활을 했다. 수녀원에서 받은 교육과 특히 라틴어 해독 능력 덕분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글과 또 ‘수도서원 서약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글을 접하고 그 내용에 공감하는 자매들과 탈출을 계획했다. 카타리나는 루터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다. 결국 루터는 수녀원에 청어를 납품하는 상인에게 부탁하여 부활절 전날 밤 청어를 실어 나르는 수레에 숨겨 수녀들 9명을 탈출시켰다. 탈출 후 그들은 토르가우(Torgau)라는 마을에 숨어 지내다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로 합류했다. 이때 탈출한 수녀들 대부분은 루터가 중매를 서서 결혼했다. 마지막 남은 카타리나는 15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41세의 루터와 결혼했다. 카타리나가 그와의 결혼을 원했다고 한다. 이 결혼은 성직자 세속결혼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카타리나는 결혼 후 수십 명 규모의 학생 기숙사를 운영하고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웠다. 억센 생활력으로 어려운 살림을 일으키고 가정을 이끌어 남편이 일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 여섯을 낳았고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도 돌보았다. 맥주도 만들어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녀의 맥주는 맛있기로 주변에 널리 알려졌고 루터는 부인의 맥주 맛에 자부심을 가졌다. 루터는 다재다능한 부인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집안 살림 경제에 있어서 카타리나에게 순종한다. 그녀가 나보다 훨씬 잘한다. 그 외의 일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했다. 루터에게 그녀는 동등한 파트너였다. 카타리나의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와 주부로서의 책임감은 종교개혁 이후의 주체적 여성의 모범이자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모델이 되었다.
1546년 루터 사후에는 재산이 교회에 귀속되고 소득이 끊기면서 카타리나는 자식들과 어렵게 살았다 한다. 루터 사망 6년 후 비텐베르크에 전염병이 찾아왔다. 페스트가 돌았다. 카타리나는 자식들을 데리고 페스트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토르가우로 거처를 옮기다 마차가 전복되면서 골반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이때의 부상은 폐렴으로 이어져 3주 후에 사망했다. 당시는 전염병이 늘 생활과 함께했다. 전염병 때문에 수녀원에서 맥주를 만들었고 또 그 전염병 때문에 피신하다 사고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수녀원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세상인 비텐베르크로 가기 전에 숨어 지내던 고향과 같은 마을 토르가우로 돌아와 숨을 거두었다. 그녀 나이 53세였다.
비텐베르그 구석구석엔 마르틴 루터와 카타리나의 흔적들로 넘쳐났다. 그 도시에 머무는 내내 그들이 눈앞에 불쑥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비텐베르크 양조장의 맥주 효모로 이어져 내려온 필스(Pils) 맥주 호프의 쌉쌀한 끝맛은 마르틴 루터와 카타리나가 유산으로 남긴 확실한 흔적이었다. 카타리나가 만든 맥주의 맛이 루터가 단골이었다는 ‘검은독수리’에서 내가 맛본 그 맛이었을까? 그 맛은 정말 깊고 황홀했지만, 카타리나가 만든 맥주의 효모가 500년을 이어져 내려와 맛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세월의 맛이 애잔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