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일용 기자 [사진=아주경제DB]
무정전 전원 장치(UPS)용 리튬이온 배터리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본원 전산실(데이터센터) 화재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 사태로 한국 배터리 산업이 침체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 가운데 대국민 행정 서비스 마비의 원인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쓸까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647개에 달하는 대국민 행정 서비스가 마비된 근본적 원인은 정부의 서비스 이중화가 미흡한 것에 있다. 3년 전 카카오톡 먹통 사건으로 민간 기업에는 강력한 재해 복구(DR)·서비스 이중화 의무를 부과한 정부가 정작 자신들의 재해 복구와 서비스 이중화에는 소홀했다.
정부는 지난 2019년 대국민 행정 서비스 이중화를 위해 DR 전용 공주 센터를 착공했지만 예산 부족 등을 핑계로 6년이 지난 지금도 완공하지 못했다. 공주 센터를 제때 완공해서 서비스 이중화만 제대로 했어도 주요 대국민 행정 서비스가 먹통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이번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본원 전산실 화재는 신문 구석에 단신으로 보도하는 해프닝에 그쳤을 것이다.
화재 원인으로 지목된 배터리를 제대로 관리했는지도 의문이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보증 기간(사용 연한)은 10년이다. 제품 보증 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당장 배터리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배터리 업계에선 안전을 위해 신제품으로 조속히 교체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데이터센터·클라우드 사업자가 배터리 보증 기간이 끝나기 전에 새 배터리로 교체한다. 반면 행정안전부·국정자원은 2012~2013년 생산된 배터리셀을 2014년 중순에 납품받아 지금까지 사용해 왔다. 사용 연한을 1년 넘게 초과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점검 내역서에는 "배터리 사용 연한(10년)을 경과한 만큼 교체를 권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전문가의 권고를 따르지 않은 것이 정부 행정 서비스 마비라는 혹독한 대가로 돌아온 것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UPS용 배터리 이설공사를 진행하면서 전원을 제대로 차단했는지도 철저하게 검증할 필요성이 있다. 전원을 제대로 차단하지 않아서 배터리로 불꽃이 튀었다면 정부가 공사 업체 관리·감독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 한국 배터리 업체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CATL, BYD 등 중국 배터리 업체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와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앞세워 한국 배터리 기업을 대상으로 치킨 게임을 걸어오고 있다. 올 상반기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의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중국 제외) 점유율은 전년보다 8.1%P 하락한 37.5%로 집계됐다. 반면 CATL은 전년보다 33.2%P 증가한 29.7%의 점유율을 보였다. 중국 배터리 기업의 안방인 중국 시장을 포함하면 이 차이는 더욱 극적으로 벌어진다.
그동안 믿을 곳은 중국 기업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미국 시장뿐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후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미국 내 투자와 미국인 고용 확대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 사태가 일어나면서 이러한 믿음도 깨졌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국 정부가 한국 기업의 편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네 탓이오" 책임을 전가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행정 서비스 마비의 원인을 배터리에서 찾으려는 정부 행보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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