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기약하는 시기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리 한국인에게 요즘은 12·3 계엄 1주년을 공동체의 사건으로 기억하면서 민주주의 회복과 함께 합당한 청산과 정확한 기록의 역사적 책무를 새김질하는 시간이겠다.
세계적으로는 파리기후협약 10주년을 평가하면서 지구온난화 대응에 관한 전 지구인의 결의를 다지는 시점이다. 2015년 12월 12일 파리에서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가 열려 195개국이 합의한 게 파리협약이다. 협약에서 세계는 지구온난화를 지구인의 의제로 확인하고, 지구온난화 저지 목표와 방법론에 동의했다. 2016년 지구의 날인 4월 22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공식 서명식이 열렸고 그해 11월 4일 국제법적 효력을 갖게 됐다. 파리협약을 체결하고 10년이 흐르는 사이에 지구촌이 얼마나 변했을까.
■“예측을 뒤엎은 10년”=파리협약 10주년을 맞아 쏟아진 분석 가운데 「파리기후협약 이후 10년: 예측을 뒤엎은 10년」(2025)이란 제목의 보고서는 세계 경제에서 오랫동안 유지된 ‘경제성장=탄소배출 증가’라는 공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에너지·기후 정보기구(ECIU)’란 곳에서 발간한 이 보고서는 소비 기준으로 전 세계 GDP의 92%에서 이미 탄소배출과 경제성장이 절대 혹은 상대적으로 탈동조화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2023년 세계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은 1.2%로, 파리협약 이전 10년의 18.4%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 세계 GDP의 46%를 차지하는 국가들에서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이산화탄소(CO₂) 배출이 줄어드는 절대 탈동조화를 달성했다. 절대 탈동조화 국가는 파리협약 이전 32개국에서 이후 43개국으로 늘었다. 상대 탈동조화 국가 역시 35개국에서 40개국으로 증가했다. 상대 탈동조화는 경제성장과 함께 CO₂ 배출량이 함께 늘어나긴 하지만, 배출량의 증가 속도가 경제성장 속도보다 느린 현상을 말한다. 이로써 경제성장과 탄소배출 증가가 단순 비례한 시대는 구조적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는 진단이 가능해졌다.
세계 최대 배출국인 중국의 움직임이 특별한 관심사이다. 2015~2023년 중국의 소비 기반 탄소배출이 24% 증가하는 동안 경제는 50% 이상 성장했다. 즉 경제성장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탄소배출 증가를 억제했으며, 최근 18개월은 전체 배출이 정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상대 탈동조화에서 절대 탈동조화 국가로 넘어가는 상태라는 얘기다. 중국이 배출 정점을 확정적으로 넘어서면 전 세계 배출 감축 속도가 빠르게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
ECIU 보고서는 선진국에서 절대 탈동조화가 이미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음을 재확인한다. 미국, 캐나다,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EU) 대부분 국가는 파리협약 전후를 통틀어 경제성장과 배출 감소를 동시에 달성한 대표적 국가들이다. 영국, 노르웨이, 스위스는 지난 20년 가장 안정적이고 큰 폭의 배출 감축을 이뤄낸 국가로 분류된다. 글로벌 사우스에서도 정책 설계, 재생에너지 확대, 투자 흐름 변화가 결합하며 탄소의 구조적 감축이 가능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뉴질랜드, 슬로베니아, 도미니카공화국 등 일부 국가는 과거 절대 탈동조화를 달성했으나 최근 다시 배출 증가 추세로 돌아선 반대 사례도 있다.
■미래 전망의 개선, 여전히 증가세인 배출 총량
파리협약 이후 기후 정책 강도가 높아지고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전 지구 평균 온도 상승 상한 전망이 낮아졌다. 파리협약 이전엔, 산업화 이전 대비 21세기 말까지 지구 평균 온도가 4°C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탈동조화’ 확대로 현재 전망치는 2.6°C 수준이다. 재생에너지 비용의 급격한 하락이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태양광·풍력 단가가 예상을 뛰어넘은 속도로 떨어졌으며 전 세계적으로 청정에너지 투자는 화석연료 투자 규모의 두 배에 달한다. 청정에너지 부문 일자리가 이미 화석연료 부문을 넘어섰고 일부 국가에서는 넷제로 산업이 여타 산업보다 세 배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배출 총량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1.5~2°C 목표를 달성하려면 향후 10년 내에 세계 탄소 배출 곡선이 명확하고 불가역적 하향 국면에 접어들어야 한다는 점이 재삼 강조된다.
전문가들은 탈동조화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기본값이 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배출의 절대적 감소 국면을 얼마나 빨리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중국의 배출 정점 도달은 그 전환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속도와 규모가 관건인데, 앞으로 10년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재생에너지 확산 속 불확실한 경로
파리협약의 성과에 냉소적 시선이 많지만, 이 협약이 만들어낸 변화가 분명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해 전 세계 재생에너지 발전 용량은 15% 증가하며 사상 최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신규 전력 생산 설비의 90% 이상이 재생에너지였다. 전 세계 청정에너지 투자액이 2조 달러를 넘어 화석연료 투자의 두 배에 달했다.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신차 다섯 대 중 한 대는 전기차다.
기후 싱크탱크 클라이밋 애널리틱스의 빌 헤어 대표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1.5°C 제한과 넷제로 목표는 정책, 금융, 법, 산업 규범 전반을 재편했다. 국가와 시장,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짜놓았다”고 평가했다.
파리협약 옹호론자들은 협약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협약 이전 상황을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협약 이전 세계는 4°C 이상의 온난화라는 파국적 경로에 놓였으나 협약 이후 전망치가 계속 내려갔다.
‘파리 체제’의 가장 큰 위협은 미국과 중국이란 두 축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2017년 파리협약 탈퇴를 진행했다. 지난 1월 백악관에 복귀한 뒤에 트럼프는 두 번째 탈퇴 절차에 착수했다. 2017년 탈퇴 선언과 규정에 따른 2020년 11월 공식 탈퇴, 2021년 2월 미국의 파리협약 공식 복귀 후 트럼프 재집권과 재탈퇴 흐름이 이어졌다. 누적 배출량 1위이자 현재 2위 배출국인 미국의 파리협약 탈퇴와 ‘파리 체제’에 반하는 정책 추진은 세계 공동의 목표를 추진하는 지구인에게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세계 1위 배출국 중국의 행로 또한 우려 사항에 속한다. 2015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파리를 찾았을 때 중국의 연간 탄소 배출량은 100억 톤 미만에서 정점을 찍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17년 이후 석탄화력 발전이 다시 늘었고 중국의 배출량이 증가해 지난해 123억 톤에 달했다. 파리협약 이후 증가한 전 세계 온실가스의 약 90%는 중국에서 발생했다. 동시에 지난해 중국은 전 세계 나머지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재생에너지를 추가했다. 중국이 갈지자 행보를 멈추고 한 방향을 향해 확고하게 걷게 될 때 지구의 미래가 밝아진다는 게 현실이자 곤혹이다.
또 다른 쟁점은 남북협력이다. 온실가스 배출로 이익을 본 북반구와 일방적 피해를 본 남반구 사이에 ‘배상’ 문제가 ‘파리 체제’의 그늘에 남아 있다. 선진국이 출연한 돈으로 만든 기후재정은 최빈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아니라 온실가스의 누적 배출에 관한 역사적 배상이자 의무라는 것이 최빈국들의 입장이다. 선진국들이 원론상 동의하지만 제 주머니 안의 돈을 꺼내놓아야 하는 것이어서 현실은 많이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파리협약의 성공을 위해선 남북문제 해결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뤄진 듯하나, 마찬가지로 속도와 규모가 쟁점으로 남아 있다.
■DNA를 바꿔야 살아남는 세상
공교롭게 파리협약 10주년인 12일에 북극곰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이 국제 학술지 <모바일 DNA>에 발표됐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 연구팀이 발표한 이 논문은 남동 그린란드 북극곰의 유전체에서 이른바 ‘점핑 유전자(jumping genes)’로 불리는 전이 가능 유전자 활동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밝혔다. 기후변화가 가속하며 해빙이 빠르게 사라지는 가운데 그린란드 남동부에 서식하는 북극곰의 DNA에서 기온 상승에 따른 변이 신호가 확인됐다는 얘기다. 야생 포유류에서 기온 상승과 DNA 변동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연결된 사례로는 세계 최초여서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연구진은 북동부와 남동부 그린란드에서 채취한 북극곰 혈액을 분석해 두 지역의 기후 차이와 유전자 발현 변화를 비교했다. 북동부 지역이 더 춥고 기온 변동이 적은 반면 남동부 지역은 훨씬 따뜻해 해빙이 거의 남지 않은 곳이다. 연구 결과 사냥·이동·번식 조건이 크게 악화한 남동부 개체군에서는 열 스트레스와 대사, 노화와 관련된 여러 유전자가 주변 기후 조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패턴을 보였다. 남동부 북극곰은 기온 상승에 따라 점핑 유전자의 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특정 DNA 구간이 환경 스트레스에 반응해 빠르게 재작성되고 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 같은 변화를 “해빙 붕괴라는 생존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급박한 유전적 전략”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남동부 북극곰은 해빙 감소로 바다표범 사냥이 어려워지면서 상대적으로 거친 식물 기반 먹이를 더 많이 섭취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동시에 기후변화로 먹이 확보가 불안정해지면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저장·소비하는 능력을 조절하는 유전적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필자가 기후위기와 관련한 강의 등에서 안타까움을 담은 농담으로 “북극곰이 살아남는 길은 서둘러 어류에 준하는 수중 생물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 연구로 부분적으로 이 농담이 농담이 아닐 수 있음이 입증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점핑 유전자’의 활성 증가는 유전체 불안정성을 높이고 면역 기능에 부담을 주는 등 부정적 영향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현재 북극은 전 지구 평균보다 두세 배 빠르게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어 과학자들은 2050년까지 전 세계 북극곰의 약 3분의2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한다. 파리협약의 목표 시점인 이 세기말이면 북극곰의 멸종 또한 현실화할 수 있다.
파리협약 10주년 딱 맞추어 발표된 이 논문의 상징성은 크다. 북극곰이 DNA까지 바꿔가며 생존에 몸부림칠 정도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자, 이 모든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바꾸진 못해도 적어도 사회의 DNA를 바꾸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경종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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