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요한의 티키타카] 이해찬은 늘 처음이었고 늘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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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시사평론가]


 
73살. 100세 인생 이야기가 나오는 요즘 상황에서 많이 아쉬운 나이다. 얼마든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에도 하느님은 천국에서 능력이 많은 그에게 할 일을 맡기시려고 하는지 훌쩍 데리고 가셨다.
 
2022년에 이해찬 전 총리는 자신의 삶을 다룬 ‘회고록’을 펴냈다. 최민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과 대담형식으로 정리했는데, 출생부터 시작해 학창시절과 재야활동, 극적으로 펼쳐진 정치입문과 이후 공인(公人)인으로 살아온 인생을 담담하게 증언했다. 발문은 그의 대학후배이자, 국회시절 보좌관과 국무총리 시절 장관으로 그의 인생을 함께 했던 유시민이 썼다. 유시민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 “남은 시간 동안 그가 사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기를 응원한다.”라고 정리했지만, 그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서 민주평통 아태지역 운영위원회 참석차 베트남 호찌민 출장 중 쓰러져 치료 중에 별세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공인(公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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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처음이었던 이해찬
 
필자는 모 유튜브 방송을 위해 이 전 총리의 회고록을 꼼꼼히 밑줄 치면서 읽었다. 그리고 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해찬은 늘 처음이었고, 그리고 그는 늘 이겼다.“
 
이해찬은 반(反) 유신 운동의 기폭제가 된 첫 시위인 ’10.2 데모‘를 모의했고 실행했다. 구속자와 수배자가 많이 나왔지만 ’10.2 데모‘ 이후 유신 반대시위는 서울대의 다른 단과대와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10.2 데모‘는 최초의 전국 단위 학생운동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이어진다. 최초는 최초로 이어진다.
 
학생운동에서 전업 운동가로 자리를 옮긴 이해찬은 물 만난 물고기라 할만 했다. 신림동에 ’광장‘이라는 사회과학서적 서점을 차려 생계와 함께 젊은이들의 지적욕구를 충족 시켰다. 광장의 뒤를 이은 ’녹두‘나 ’논장‘, ’다락방‘같은 서점이 탄생한 것을 보면 이 역시 처음 아닌가 싶다.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정책실 차장으로서 조직의 재정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처지다보니 보신탕집과 다방까지 운영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지속되었다.
 
이해찬은 재야 운동권이 제도권 정치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첫 케이스가 되었다. 1988년 평민련이라는 이름으로 재야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에 부응했다. 서른 다섯 살의 똘망똘망한 이해찬은 과거의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서 쌓은 역량을 제도권의 능력으로 맞바꾸었다. 그의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기록은 계속 쌓였다. 이해찬은 DJ의 단식 전, 지방자치제를 요구하면서 의원직을 내던지고 단식투쟁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92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당무기획실장으로서 최초의 ’공채‘를 실시했는데, 공교롭게도 이재명 대통령이 베트남에서 쓰러진 이해찬을 위해 보낸 정무특보 조정식 의원이 그 최초의 공채 합격자였다.
 
무엇보다 이해찬의 최초로 기록할 만한 것은 최초의 ’책임총리‘ 라는 것이다. 방폐장, 행정수도, 공공기관 이전, 평택 미군기지, 한미FTA 등 참여정부에서 모든 갈등과제는 난제였고, 노무현 대통령의 진을 빼는 과제였다. 이 쌓이는 과제를 이해찬은 정면 돌파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과 총리실 정책상황실이 정책협의회를 했고, 관련 부처 장관도 함께 회의를 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나 수석은 질문에는 모두 답을 했지만 의견을 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책에 관한 건 총리한테 다 위임했으니 토 달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해찬은 ”책임총리제를 그렇게 실행했다.“라고 단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나는 뭐 하나“라면서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해찬은 행정복합도시 건설 등 16개 주요 국정 현안들을 거의 다 해결하고 2006년 3월까지 2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을 대한민국 최초의 ’책임총리‘의 역사를 썼다.
 
늘 이기던 이해찬
 
이해찬은 적어도 자신이 후보자로 출마한 선거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혹자는 관악(을)이라는 편한 곳에서 5선을 하고 그 배경으로 세종에서도 내리 이기는 것이 뭐 대단하다고 그러냐, 라고 이야기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필자가 한때 선거로 밥을 먹었던 정치컨설턴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찬은 대한민국 최고의 전략가이자 기획자다. 뻔한 이야기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언론에서는 잘 주목하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2018년 그가 전당대회에 당 대표로 출마할 때, 건강 문제 등 여러 사정이 있어 늦게 출마결심을 밝히며 도전을 했는데, 막상 일주일을 선거운동을 해 보려고 하니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의원들의 반응이 ”당신은 안 된다“라는 사람은 없지만 돕겠다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곤란해 하면서 ”찍어는 주겠다“는 사람만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 66세 이해찬의 기지가 발휘되었다. 회고록에서 이해찬은 이렇게 서술한다.
 
인상적인 뭔가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한 표 줍쇼’를 생각해 냈어. <한끼줍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잖아요. 이경규, 강호동이 나오는. 그걸 보고 내가 개발한 거예요. 경선할 때 연설 마지막에 “한 표 줍쇼~”그랬지. 반응이 좋아. 선거운동 마지막 날 내가 40~42%는 얻을 것 같다고 했더니 이해식이 물어요. 어떻게 아시냐고. 그게 감이야. 실제로 42.88%가 나왔어요.
 
이해찬에게 이 정도의 선거 에피소드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겠으나 그가 늘 이겼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 선거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해찬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들의 야만적 공포정치의 희생자다. 늘 수배를 당하고, 감옥을 가고, 고문을 당하고, 도망을 다니고, 감시를 당하고,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가 수사가 끝나 유치장으로 넘어가서도 아침에 불려가서 고문당하고 매 맞고, 오후에 시체처럼 돌아오니 사람들이 다들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그랬다. 이해찬이 이번에 73살이라는, 사실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에 일찍 타계한 것을, 김근태 선생과 비교를 하면서 ‘고문 후유증’ 탓을 하는 사람이 많다. 비록 그런 고난을 당했지만, 이해찬은 꿋꿋하게 이겨냈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대단한 기록이다.
 
게다가 이해찬은 늘 후배 유시민의 이야기대로 공적(公的, public)인 사람이다. 그의 꿈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이고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엇 무엇을 이루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공적 마인드로 무장한 그이기에 앞으로 그의 부재(不在)가 더욱 아쉬울 것 같다.
 
이해찬은 회고록을 마무리하면서 DJ가 하신 말씀을 조금 느낀다고 했다. 자신도 이에 동의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역시 DJ의 브레인답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필자 주요이력 
- 前 정치컨설턴트
- 前 KBS 뉴스애널리스트
- 現 경제민주화 네트워크 자문위원
- 現 최요한콘텐츠제작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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