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이기는 시장 없다"
이재명 대통령만큼 정치의 역할을 중시하는 대통령은 없을 듯하다. 정치 만능주의에 가까울 정도다. 정치가 중요함은 물론이다. 문제는 어떤 정치냐이다.
이 대통령은 ‘억강부약, 대동세상’도 역설한다. 지난 6월 4일 대통령 당선자로 국정 방향을 밝히면서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고 공평하게 기회를 함께 누리는 억강부약의 대동세상을 우리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다"고 했다. 억강부약은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돕는다는 뜻이다. 대동세상은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말한다. 이 대통령은 2022년 7월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도 “억강부약 정치로 모두 함께 잘사는 대동세상을 향해 가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21년 12월 서울대에서 열린 금융 경제 세미나 초청 강연에서 ‘경제는 과학이 아닌 정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 대통령 정치 중시 철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봐도 될 듯하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은행 대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가난하면 안 빌려주고 빌려줘도 조금밖에 안 빌려 주고 이자를 엄청 높게 내야 하고 장기로 안 빌려 주는데 부자는 원하는 만큼 저리로 장기간 빌릴 수 있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작년 9월 국무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했다. “고신용자에게 저리로 장기·고액 대출을 해주면서, 저신용자에겐 고리로 소액·단기 대출을 제공한다”며 “고신용자의 이자 부담을 늘려 저신용자의 대출 금리를 낮추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저신용자는 대출금을 갚지 못할 위험이 크다. 은행으로선 떼일 위험이 크니 금리를 높여 대출을 제한하려 한다. 이게 시장경제 원리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이를 ‘정의롭지 않다’고 했다. 이런 부정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고신용자의 이자 부담을 늘려 저신용자의 대출 금리를 낮추는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이런 방안은 시장경제 원리에 반한다. ‘과학’이 아니라 정치이다.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 실현
이 대통령 말대로 정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을 ‘그저 사는 삶’과 ‘좋게 사는 삶’으로 구분했다. 그저 사는 삶이란 하루하루 먹고사는 삶을 말한다.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하고, 남과 경쟁도 해야 한다. 이런 삶에는 불법과 비리, 불공정과 불평등, 약육강식 같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반면에 좋게 사는 삶이란 인간다운 품격을 누리며 사는 삶이다.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고, 법과 도덕이 바로 서고, 약자가 보호받는 가운데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게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능이 정치라고 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정치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라며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짐승은 정치적 동물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사는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했다. 인간처럼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인식하고 이를 추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정치 중시 철학은 ‘그저 사는 삶’을 넘어 ‘좋게 사는 삶’을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정치가 저절로 좋게 사는 삶을 실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좋은 정치라야 그럴 수 있다. 플라톤은 ‘참다운 지식’에 의한 정치를 좋은 정치라고 했다. 참다운 지식이란 ‘진짜 좋은’ 게 무엇인지 아는 것을 말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진짜 좋은 게 무엇인지 알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하는 정치가 좋은 정치라는 뜻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김일성의 소련식 공산 통일 야욕에 맞서 남한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 제2의 6·25전쟁을 막기 위해 손사래 치는 미국을 붙잡고 늘어지며 한·미 안보 동맹을 맺었다. 그 덕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 이런 게 나라와 국민을 위해 ‘진짜 좋은’ 게 무엇인지를 알고 실현하는 정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정책,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금융 실명제 실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확대 실시도 그런 예라 할 것이다.
좋은 정치를 하려면 여러가지가 필요하다. 눈앞의 이익에 얽매이지 않기,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갖추기, 대중의 감정과 탐욕에 끌려가지 않기, 지지층에 영합하며 표 계산하지 않기 같은 일들이다. 민주화 시대에는 반대 의견 경청하고 수용하기, 다수결 정치보다 합의의 정치 하기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는 어떤가?
노란봉투법·검찰청 폐지 등 강행
소비 쿠폰을 전 국민에게 지급할 게 아니라 생계가 어려운 저소득층에 집중 지급해 소비 쿠폰 예산을 최소화하고, 남는 예산을 사회간접 시설 확충이나 연구 개발 시설 등에 쓴다면 경제 성장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 경우 경제 성장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몇 년, 심지어 십 년 이상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짝 성장에 그치지 않고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일자리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게 ‘진짜 좋은’ 일 아닌가.
오는 3월 10일부터 노란봉투법이 시행된다. 이 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그러나 부작용이 우려된다. 가장 큰 문제는 원청 업체가 수십, 수백 개 하청업체 노조와 일일이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됐다는 점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원청 업체에 직접 교섭을 요구하라는 공문을 이미 하청업체에 보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의 하청 업체 40여 곳이 현대차 측에 공문을 보내 교섭을 요구하고 나섰다. 원청 업체인 현대차가 이들 하청 업체의 사용자임이 인정됐다고 보기는 아직 어려운 상황이다.
이 경우 원청 업체가 하청 업체의 사용자인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교섭에 응하지 않으면 부당 노동 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이런 위험 자체가 경영에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청 업체 노조가 원청 업체와 일대일 교섭을 하면 하청 업체 노동자 권리는 더 보호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하청 업체와 일일이 교섭해야 하는 원청 기업은 경영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노동자 권리 보호도 중요하지만 기업 경영 부담 안 주기도 중요하다. 노조와 기업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제도가 진짜 좋은 방안이다. 노란봉투법을 진짜 좋은 제도라고 할 수 있나?
현 정부 정책 중 나라와 국민에게 진짜 좋은 일인지 묻게 하는 정책은 경제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검찰청 폐지도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검찰권 남용을 막는 조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검찰이 권한을 남용하고 정치 수사를 한다는 비판을 받는 부서는 국회의원, 청와대 비서관, 장·차관, 판·검사 등 권력자 수사를 전담하는 특수부다. 특수부 검사는 전국 검사 2000여 명 중 10% 정도에 불과하다. 대다수 검사는 형사부 소속이다. 형사부 검사는 일반 국민들이 관련된 범죄를 다룬다. 그중 가장 큰 업무가 경찰이 수사한 뒤 보내온 사건을 재검토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경찰 수사의 허점이나 적법절차 위반 여부 등을 가려낸다.
과연 '진짜 좋은' 일인가
검찰청이 폐지되면 경찰 등 1차 수사기관에 대한 사법 통제 장치가 없어진다. 수사의 허점이나 적법 절차 위반이 있어도 묻히기 쉽다. 그 결과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리거나 진짜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커진다. 검찰 특수부 기능의 대부분은 이미 공수처로 넘어갔다. 검찰권 남용의 핵심 원인이 제거된 셈이다. 그런데도 검찰청을 없애려고 한다. 이게 진짜 좋은 일인가?
이 대통령은 최근 다주택자가 세입자 문제 등으로 집을 처분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언론 보도를 거론하면서 “돈이 마귀라더니, 설마 마귀에게 최소한의 양심마저 빼앗긴 건 아니겠죠”라고 했다. “부동산 투기로 불로소득 얻겠다는 수십만 다주택자의 눈물이 안타까우신 분들께 묻는다”며 “이들로 인한 수백만 청년의 피눈물은 안 보이시냐”고도 했다.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를 종료해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쪽을 비난하는 말이다.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정책이 집값 안정화에 별 효과가 없었음은 문재인 정부 때 이미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는 2014년 폐지됐던 양도세 중과를 2017년 8월 정권 출범 3개월 만에 8·2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면서 2018년부터 부활시켰다. 당시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시간을 줄 때 파시라"고 했다. 그래도 집값이 잡히지 않자 2020년 발표한 7·10 대책에서는 양도세 중과세율을 더 높였다. 그럼에도 집값 잡기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목적이 같더라도 방법은 다를 수 있다. 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대통령이 책망하면 자유로운 이견 제시를 통한 깊이 있는 토론과 숙의는 불가능해진다. '진짜 좋은' 정책으로 ‘좋게 사는’ 삶을 실현하는 정치를 보게 되길 기대한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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