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어선 프레임… 90초에 사활 건 K-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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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I가 생성한 이미지]
프레임이 일어섰다.

극장 스크린과 거실 TV가 당연하게 지켜온 가로 화면이 스마트폰 앞에서 힘을 잃고 있다. 이제 우리는 화면을 돌리지 않는다. 화면이 우리를 향해 세워진다. 이야기는 좌우가 아니라 위아래로 흐른다. 엄지손가락이 장면을 넘기고, 다음 이야기를 재촉한다.

눈에 띄는 건 참여하는 얼굴들이다. 긴 호흡의 작품으로 천만 관객을 움직였던 감독들까지 1분 남짓한 세로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선택을 가벼운 실험이라 보기 어렵다. 긴 작품이 사라졌다는 뜻도 아니다. 제작 현장의 계산법이 달라졌다는 신호로 읽힌다. 

최근 몇 년 사이 드라마 제작 환경은 빠르게 팽창했다. 회당 제작비가 수십억 원을 넘기고, 총제작비 수백억 원이 오가는 프로젝트도 낯설지 않다. 문제는 규모가 커질수록 위험도 함께 커졌다는 점이다. 촬영을 마치고도 편성을 확정하지 못한 작품이 이어지고, 플랫폼의 선택을 기다리다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이 쓰면 안전하다는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 틈에서 숏드라마가 존재감을 키웠다. 제작비는 수억 원대로 알려지고, 촬영 기간도 몇 주 단위로 압축된다.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 역시 길지 않다. 무엇보다 한 편에 모든 걸 걸지 않는다. 비교적 작은 작품 여러 편을 동시에 제작해 반응을 살피고, 살아남은 이야기를 더 키운다. 실패의 부담을 낮추고 시도 횟수를 늘리는 방식이다. 이는 비용 절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 태도의 변화에 가깝다.

숏드라마를 가벼운 소비물로만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실제 이용 흐름을 들여다보면 양상이 다르다. 한 편이 1~2분에 불과해도 수십 편을 연달아 시청한다. 일부 플랫폼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상위권 작품은 높은 완주율을 보인다. 특히 장편 드라마와 연속극을 꾸준히 소비해온 30대 이상 여성 이용자 비중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짧은 시간 안에 다음 회를 누르게 만드는 구성,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전개가 시청 습관을 바꾸고 있다. 시간을 줄인 것이 아니라, 잘게 나눠 쥐고 있는 셈이다.

기술도 이 흐름에 힘을 보탠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촬영과 편집 과정을 간소화하고, 특수효과 비용을 낮추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배우의 얼굴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든 디지털 인물이 화면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제작 여건이 넉넉하지 않아도 다양한 장르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 K-팝 아이돌이 합류하면서 숏드라마는 팬덤을 품은 콘텐츠로 확장되고 있다. 글로벌 팬을 확보한 이름이 참여하면 공개와 동시에 해외 이용자 유입이 일어난다. 세로 화면은 더 이상 주변 시장이 아니다.

그러나 낙관만 할 수는 없다. 해외 플랫폼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중국 시장은 막대한 자본과 이용자를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제작사가 이야기만 공급하고 유통과 데이터는 외부 플랫폼에 의존하는 구조가 굳어진다면, 장기적으로 협상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자극적인 소재 경쟁도 경계해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눈길을 끌기 위해 강한 설정만 반복된다면, 금세 피로감이 쌓인다.

이제 필요한 것은 차분한 대응이다. 우선 지원 체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장편 위주로 설계된 금융·세제 구조가 새로운 제작 방식과 맞는지 살펴봐야 한다. 작은 규모의 제작사도 기술을 실험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방안이 필요하다. 동시에 국내 플랫폼의 해외 진출을 돕는 전략도 병행돼야 한다. 유통망과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하면 산업의 성과도 온전히 남기 어렵다. 아울러 짧은 제작 일정 속에서 일하는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장치 역시 마련돼야 한다. 속도가 빠를수록 기본은 더 단단해야 한다.

문화 경쟁력은 더 이상 길이에만 달려 있지 않다. 사람들이 하루 중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머무느냐가 중요해졌다. 세로 화면은 그 일상의 틈을 파고든다. 출퇴근 길, 점심시간, 잠들기 전 몇 분. 그 자투리 시간이 모여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프레임은 이미 세워졌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인정하느냐, 외면하느냐다. 숏드라마는 긴 작품을 대체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달라진 시청 환경에 맞춰 제작 방식이 조정된 결과다. 거대한 프로젝트 한 편에 의존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작고 빠른 시도를 반복하는 구조로 옮겨가고 있다.

90초라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그 90초를 수십 번 이어 붙이면 결코 짧지 않다. 지금 K-드라마는 그 시간을 붙잡기 위해 전략을 다시 세우고 있다. 화면의 방향이 바뀌었다면, 제작의 계산도 달라져야 한다. 선택은 이미 시작됐다. 이제 남은 건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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