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심은 세 가지다. 첫째는 유대인의 집단적 공포, 둘째는 팔레스타인의 상실과 분노, 셋째는 예루살렘이라는 절대 양보가 불가능한 성지다. 이 세 축을 놓치면 중동전쟁은 끝내 ‘누가 더 나쁜가’의 감정 싸움으로만 보이지만, 이 세 축을 붙들면 왜 70년이 넘도록 평화가 무너지고 다시 무너지는지가 비로소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유대교는 종교이고, 유대인은 종교와 혈통이 겹치는 집단이며, 이스라엘은 1948년에 세워진 현대 국가다. 유대인이라고 모두 이스라엘 국적인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 국민이라고 모두 유대인인 것도 아니다. 이 기본 구분이 흐려지는 순간,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 비판은 쉽게 유대인 전체에 대한 편견으로 흐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룰 때는 국가와 민족, 종교를 엄격히 나누어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이 유대교와 유대인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갖는 무게는 매우 크지만, 그것이 곧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모든 정책을 자동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는 분명 아시아, 곧 중동의 나라다. 그러나 정치·경제·문화적 정체성은 오랫동안 유럽에 더 가까운 방향으로 형성되어 왔다. 유럽계 유대인 이민의 비중, 서구식 제도, 미국 및 유럽과의 긴밀한 전략 관계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중동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주변 아랍 사회로부터는 종교적·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이 이질감은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충돌이라는 더 깊은 차원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지형적 취약성이 더해진다. 이 나라는 국토가 좁고 길며, 일부 구간은 폭이 극단적으로 좁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략 사상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위협이 현실이 되기 전에 없애야 한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요르단·시리아를 상대로 선제 타격을 감행했고, 전쟁 결과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 승리는 이스라엘에는 생존의 기적이었지만,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에는 더 길고 더 깊은 점령의 시작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안보 정책은 늘 선제 타격과 억지력, 그리고 점령지 완충지대 논리 위에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이해하려면 오늘의 지도보다 먼저, 유대인의 2000년을 보아야 한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유대인은 오랜 디아스포라를 겪었다. 영국의 추방, 스페인의 추방, 동유럽의 포그롬, 그리고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집단의 무의식에 하나의 결론을 새겨 넣었다. “나라가 없으면 아무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이 결론은 감상이나 선전이 아니라, 반복된 역사적 체험의 압축이다. 유대인의 국가 건설 열망은 단지 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학살과 추방의 기억에서 나온 생존 본능이었다.
바로 그 생존 본능이 19세기 말 시온주의로 구체화되었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 곧 고대 유대 왕국의 역사적 공간에 유대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었다. 문제는 그 땅이 비어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영국은 1917년 밸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설립을 지지했지만, 그 땅에는 이미 아랍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후 영국 위임통치와 국제정치의 계산이 겹치면서, 한 땅에 두 개의 민족적 약속이 동시에 들어섰다. 이 모순은 훗날 중동 갈등의 핵심 뇌관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국제사회는 홀로코스트의 충격 속에서 1947년 유엔 총회 결의 181호를 통해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와 유대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관리하에 두는 구상을 제시했다. 유대인 측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아랍 측은 자신들이 다수로 살아온 땅을 외부가 나누어 준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직후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을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은 나크바, 곧 ‘대재앙’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유엔과 관련 국제기구는 1948년 전쟁으로 약 70만~75만 명 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발생했다고 본다. 하나의 사건이 두 개의 기억으로 갈라진 지점, 바로 여기서 오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단지 과거사가 아니다. 난민의 귀환권, 보상, 국적, 거주권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지에서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살아간다. 이스라엘은 국가 생존을 위해 싸웠다고 말하고, 팔레스타인은 바로 그 국가 탄생의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었다고 말한다. 두 기억은 서로를 부정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래서 이 갈등은 단순한 현재형의 전쟁이 아니라, 미해결된 건국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구조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루살렘은 왜 늘 협상의 마지막 문턱에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 도시는 세 종교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에게 예루살렘은 솔로몬 성전의 자리이며, 성전은 가장 깊은 종교적 열망의 공간이다. 기독교에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 겹쳐진 곳이다. 이슬람에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야간여행과 승천이 연결된 거룩한 도시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단순한 행정수도가 아니라, 신학과 정체성과 구원의 기억이 한 점에 압축된 장소다. 이 도시를 나누는 것은 땅을 나누는 문제를 넘어, 각 종교가 자기 역사와 상징의 중심을 어떻게 포기하느냐의 문제로 변한다.
1947년 유엔은 예루살렘을 국제관리 도시로 두려 했지만, 역사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과 구시가지를 장악했고, 1980년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자국의 “완전하고 통일된 수도”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일반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미래 국가의 수도로 요구하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의 분할을 거부한다. 1990년대 이후 두 국가 해법이 수없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늘 예루살렘 문제가 모든 협상을 막아 세웠다. 나눌 수 없는 성지를 나누어야 하는 협상은 구조적으로 가장 어렵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정착촌 문제다. 이스라엘은 1967년 이후 점령지, 특히 요르단강 서안 곳곳에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해 왔다. 이스라엘 국내 정치에서는 안보와 성서적 권리 논리로 이를 옹호하는 세력이 강하고, 국제사회는 대체로 이를 국제법 위반 내지 평화 저해 요소로 본다. 이 정착촌이 커질수록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세워질 영토의 연속성은 약해지고, 두 국가 해법은 점점 현실성이 줄어든다. 팔레스타인 내부도 파타와 하마스로 갈라져 하나의 협상 주체를 만들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도대체 누구와 최종합의를 하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오늘의 전쟁은 더 이상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중동의 중심축은 “아랍 대 이스라엘”에서 “이란 대 이스라엘”로 점차 이동했다. 이란은 반이스라엘 노선을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 삼았고,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라믹 지하드, 예멘의 후티 등과 함께 이른바 ‘저항의 축’을 형성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치고, 시리아를 치고, 가자를 치는 이유도 결국 그 배후에 있는 이란의 전략망을 끊겠다는 계산에서 나온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핵심이지만, 지금의 군사구조는 분명 이란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다.
핵 문제는 여기에 결정적인 폭발물을 더한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핵 보유를 공식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 ‘핵 모호성’ 정책을 유지해 왔다. 반면 미국은 이스라엘의 질적 군사우위, 이른바 QME를 법과 정책 차원에서 보장해 왔다. 이는 중동에서 어떤 국가나 비국가 행위자도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구조다. 이 구도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이스라엘에게 외교적 골칫거리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협으로 인식된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핵 시설에 대한 과거 이스라엘의 선제 타격 논리도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그래서 아랍 세계도 더 이상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 이후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은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중대하지만, 걸프 국가들에겐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대리세력 확장이 더 직접적인 위협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공식 수교는 아니더라도 반이란 억지라는 큰 틀에서는 이스라엘과 전략적 이해를 공유해 왔다. 이제 중동은 더 이상 “아랍 대 이스라엘”의 단순 구도가 아니다. “이란을 견제하려는 국가와 세력” 대 “이란과 그 네트워크”의 구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2026년 전면전 국면은 이 오래된 구조가 최근 직접 충돌로 터져 나온 최신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이스라엘과 이란은 이미 2024년에 두 차례 직접 충돌의 선을 넘었고, 2025년 6월에는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과 군사 인프라를 겨냥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2026년 3월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 이란 최고지도자 사망, 헤즈볼라 전선 확대,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이어지며 전쟁은 중동 전체의 질서를 흔드는 수준으로 비화했다. 이는 더 이상 국지전이 아니라, 핵·에너지·해상교통·세계 금융을 동시에 흔드는 복합 전쟁이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같은 에너지 수입국에 치명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곳은 세계 에너지 흐름의 심장부이고, 중동의 군사 충돌이 곧바로 유가, 환율, 수입 물가, 산업 생산으로 번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한국이 중동전쟁을 볼 때는 단순한 국제뉴스의 차원을 넘어, 국가 생존과 경제 안보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중동의 미사일 한 발이 서울의 주유소 가격과 공장 원가, 가계 물가를 흔드는 세상에서 한국은 결코 방관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결과를 용인하는 일은 아니다. 유대인의 역사적 공포가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희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상실과 분노가 민간인을 겨냥한 무차별 공격의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이해는 필요하지만, 면죄는 위험하다. 이 갈등을 “악한 이스라엘 대 선한 팔레스타인”, 혹은 그 반대로 단순화하는 것은 중동의 현실을 가장 심각하게 오독하는 방식이다. 이 전쟁은 두 개의 역사적 공포가 충돌하는 구조이지, 만화처럼 선과 악으로 분리되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예루살렘을 모르면 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다. 예루살렘은 도시인 동시에 기억이고, 기억인 동시에 신앙이며, 신앙인 동시에 주권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지도 위에서 그 크기보다 훨씬 더 큰 전쟁을 낳아 왔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보고,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에서 빼앗긴 미래의 회복을 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이 도시를 통해 자기 신앙의 깊은 원형을 확인한다. 중동전쟁의 영원한 도화선이 예루살렘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쉽게 멈추지 못한다.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멈출 수 없다고 믿는 쪽에 가깝다.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에게 국가는 단지 정치 단위가 아니라 생존의 마지막 방파제다. 팔레스타인에게도 땅은 단지 부동산이 아니라 역사와 존엄의 자리다. 이 두 감정이 예루살렘에서 부딪히고, 이란과 미국, 헤즈볼라와 하마스, 걸프 국가와 국제 석유 시장이 그 위에 덧씌워지면서 중동전쟁은 계속해서 세계의 중심 사건이 된다. 이 모든 구조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늘 뉴스를 따라가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이 구조를 정확히 붙들면, 왜 중동이 자꾸 세계를 흔드는지, 왜 예루살렘이 아직도 인류사의 가장 뜨거운 이름 가운데 하나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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