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철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지난 사반세기 노인학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은 개념의 하나가 바로 스테레오 타입 위협이다. 클로드 스틸과 조슈아 애런슨이 처음 제안한 이 개념은 곧 노인 연구로 확장되었다. 예일대학교 베카 레비 교수팀은 기억력 검사 전 고령 참가자에게 부정적 노화 메시지를 읽게 하자 검사 점수가 유의미하게 낮아졌을 뿐 아니라, 전전두엽 활동 감소와 코르티솔 수치 상승이 동시에 관찰됐다고 밝혔다. 인식이 생리를 실시간으로 바꾼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년층을 20년 이상 추적한 종단 연구 결과다. 노화에 긍정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부정적 태도를 가진 사람보다 심혈관 질환 발병률이 38% 낮았고, 평균 수명은 7.5년 길었다. 혈압·콜레스테롤·흡연 여부를 모두 통제한 후에도 이 효과는 독립적으로 유지됐다. 규칙적 운동의 수명 연장 효과가 약 3~5년임을 감안하면, 노화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운동 여부보다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이 고령사회에서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일상 언어와 미디어는 시니어를 향한 부정적 메시지를 쉼 없이 쏟아낸다. 노인네, 꼰대,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 광범위하게 퍼진 ‘틀딱’이 대표적이다. 은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사고를 구조화하는 틀이다. "노인은 사회적 비용이다"라는 표현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실제로 노인을 그렇게 인식하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고령자 자신이 이 언어를 내면화한다는 사실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지배 담론이 피지배 집단에 의해 자발적으로 재생산되는 폭력, 즉 ‘상징적 폭력’이 고령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다. TV 뉴스의 노인은 주로 피해자나 의존적 존재로, 예능에서는 기술에 서툰 "귀여운 할아버지, 할머니"로 그려진다. 능동적이고 유능한 주체로서의 시니어는 거의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더욱 처절하다.
한국의 요양병원 수가 2023년 기준 1700개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고령자 돌봄 인프라의 확충으로서 복지적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지만, 비판적 의료사회학은 이 수치를 전연 다르게 읽는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 치료와 재활보다는 장기 수용이 목적이 되고, 고령자는 의사결정 주체가 아니라 관리 대상으로 전환하고 있다. 신체 억제대 사용, 과도한 약물 처방, 외출 제한 등이 일상적이다. 더 근본적 문제는 자율성 상실이다. 의료화 과정에서 고령자는 점차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다. 의사가 결정하고, 가족이 동의하며, 본인은 수동적으로 따를 뿐이다. “선생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자식들이 결정했어요” 같은 말이 일상적이다. 학습된 무력감이 강화된다. 통제할 수 없다는 믿음은 우울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자율성을 잃은 고령자는 더 빨리 쇠약해진다. 바로 인식적 노화가 생물학적 노화를 촉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인식 전환과 더불어 가치 척도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첫째는 생산성에서 기여도로의 전환이다. 80세 장인이 전통 기술을 도제에게 전수하는 과정은 생산성 지표로는 비효율의 극치다. 반면 기여도의 관점에서는 문화적 자산을 보존하고 차세대를 양성하는 중요한 활동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손자녀가 있는 65세 이상 고령자의 58.2%가 하루 평균 3시간을 돌봄에 할애하며, 이를 보육교사 시급으로 환산하면 연간 10조원에 달하는 경제적 가치다. 그러나 이는 GDP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는다.
둘째는 속도에서 질로의 전환이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 경제 성장의 동력이었지만 졸속 공사, 성급한 의사결정, 번아웃과 과로사 등 부작용의 온상이기도 했다. 고령자는 흔히 느린 존재로 인식된다. 걷는 속도, 말하는 속도, 일하는 속도가 젊은이보다 느리다. 그러나 질 중심 사회에서는 장점이 된다. 느리기 때문에 세심하고,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실수가 적으며, 시간을 들이기 때문에 완성도가 높다. 슬로 푸드, 슬로 시티, 슬로 라이프가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셋째는 효율에서 의미로의 전환이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밝혔다. 어린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주는 할머니, 지역 텃밭을 가꾸는 할아버지의 활동은 GDP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결속과 세대 간 연대를 만들어낸다. 가치 척도가 효율에서 의미로 이동하는 순간, 이들은 사회의 부담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자본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경제 자본(돈), 문화 자본(교육과 문화적 소양), 사회 자본(인간관계와 네트워크). 현대 사회는 경제 자본만을 중시하지만, 실제로 사회를 작동시키는 것은 사회 자본이다. 신뢰, 협력, 호혜성이 없으면 경제도 작동하지 않는다. 고령자는 평생에 걸쳐 축적한 사회 자본의 보유자다. 예를 들어 70세 마을 이장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고, 각 가구의 사정을 파악하며, 갈등이 생기면 중재한다. 이 역할을 젊은 공무원이 대체할 수 있을까? 형식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그가 가진 수십년간의 관계와 신뢰는 대체 불가능하다. 기업의 고문이나 자문위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산업 내 인맥, 명성, 신용이다. 전화 한 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 자본이 경제 성장, 건강, 행복과 모두 양의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사회 자본을 잃고 있다. 이웃과의 관계, 시민단체 참여, 공동체 활동이 모두 감소하고 있다. 고령자는 이 공백을 메우는 핵심 집단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이 자원봉사, 동호회, 종교 활동 참여율이 다른 연령대보다 높다. 이들이 은퇴로 사회에서 이탈하면 사회 자본도 함께 소실된다.
또한 시니어의 역할이 시대적으로 새롭게 요구되고 있다. 21세기는 정보가 넘치지만 판단력이 부족한 시대다. 지식에 경험과 성찰이 더해진 지혜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원이며, 지혜는 시간과 함께 축적된다. 현행 정년 제도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순간에 조직에서 내보낸다.
최근 폭발적 인공지능의 발전은 노동 시장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많은 논자들이 AI가 노인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AI 시대는 시니어의 핵심 자산인 지혜와 판단력을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AI는 방대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고 빠른 답을 내놓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맥락을 이해하고, 윤리적 판단을 내리며, 인간관계를 조율하고, 예측 불가능한 위기 상황에서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특히 풍부한 경험을 가진 시니어의 영역이다. 의료 AI가 영상을 판독하더라도 환자에게 진단을 전달하고 치료 방향을 함께 결정하는 경험 많은 의사가 필요하다. 알고리즘이 법률 문서를 분석하더라도 의뢰인의 삶과 감정을 이해하는 베테랑 변호사가 필요하다.
AI는 과거 데이터를 학습한다. 하지만 인류가 기후 위기, 팬데믹, 지정학적 격변과 같은 전례 없는 문제에 직면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과거를 직접 살아내며 위기를 극복한 경험자들의 지혜다. 한국이 불과 한 세대 만에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로 도약한 경험을 몸으로 기억하는 시니어들의 경험은 어떤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다.
세계 각국의 사례는 시니어의 적극적 참여가 개인과 사회 모두에 이익임을 증명한다. 미국 은퇴자협회(AARP)는 50세 이상 회원 4000만명을 기반으로 정책·훈련·봉사를 연결하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독일의 다세대 하우스 프로그램은 노인·청년·어린이가 서로 돕고 배우는 세대 간 공동체를 전국 550곳 이상에 설립했다. 일본에서는 70~80대 노인이 IT 기업의 디지털 감성 자문단으로 활동하며, 젊은 개발자들이 놓치는 고령 소비자 관점을 제공해 시장을 공략하는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
인식적 노화를 넘어 가치적 노인상으로의 전환, 사회적 결핍에서 자산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이것은 노인만을 위한 의제가 아니다. 멘토로서 차세대를 양성하고, 장인으로서 문화를 전승하며, 사회 자본의 보유자로서 공동체를 연결하는 시니어들의 기여를 가시화하는 것이 시작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시니어인 사람도, 언젠가 시니어가 될 사람도 우리 모두 함께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사회적 합의다.
필자 박상철 주요 이력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 ▷국제백신연구소한국후원회 회장 ▷전남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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