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가까이 보수당과 노동당이 번갈아 권력을 주고받으며 지탱해온 양당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이번 잉글랜드 지방선거는 단순한 집권당 심판이 아니었다. 기존 정치 질서 자체에 대한 유권자들의 피로와 불신이 얼마나 깊고 넓게 퍼졌는지를 한꺼번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8일(현지시간) 기준 영국개혁당은 잉글랜드 지방의회에서 약 790석을 휩쓸었다. 사실상 전부가 새로 빼앗아 온 의석이다. 반면 노동당은 597석을 잃었고 보수당도 366석이 날아갔다. 노동당이 과반을 유지하는 지방의회는 32곳에서 18곳으로 쪼그라들었다. 웨일스에서는 1999년 자치의회 출범 이후 27년간 한 번도 내주지 않았던 제1당 자리가 민족주의 정당 플라이드 컴리에 넘어갔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노동당 대표 아나스 사와르가 자신의 지역구 의석조차 지키지 못했다.
패배의 지리가 더 충격적이다. 앤절라 레이너 전 부총리의 지역구 테임사이드, 리사 낸디 문화장관의 기반 위건 — 잉글랜드 북부와 중부 공업지대, 노동당이 수십 년을 경작해온 그 땅에서 영국개혁당이 의석을 쓸어담았다. 이것이 단순한 이념 이동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개혁당은 2018년 브렉시트당으로 출범해 반이민·반EU 기조로 성장해왔다. 오랫동안 주류 정치권의 바깥에서 '항의 정당'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그 위상을 바꿨다. 영국개혁당은 이제 보수당을 대체할 수 있는 잠재적 우파 중심 세력으로 올라섰다.
이 현상을 이념의 이동으로만 읽으면 본질을 놓친다. 근저에는 생활 불안의 정치화가 있다. 물가 상승, 주거난, 지역경제 침체, 공공서비스 붕괴, 이민 갈등 — 오랫동안 쌓인 이 불만들을 기존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임계점을 넘은 것이다. 보수당은 14년 장기 집권의 피로와 경제 실패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노동당은 정권 교체 이후 기대만큼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다. 유권자들은 더 강한 언어와 더 선명한 메시지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어 스타머 총리에게 이번 결과는 치명적인 경고다. 2024년 총선 압승으로 안정적 중도 리더십의 상징이 됐던 그가 집권 2년도 안 돼 '역대급 비호감 총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제 부진, 정책 후퇴, 인사 논란이 겹쳤다.
그럼에도 스타머는 사임을 거부했다. "아픈 결과이며 내 책임을 통감한다. 그러나 사임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했다. 주목할 것은 금융시장의 반응이다. 사임 거부 이후 파운드화는 강세를 보였고 국채 금리는 내렸다.
시장은 스타머 퇴진보다 그 이후 등장할 수 있는 강경 좌파 지도부를 더 불안하게 봤다. 오늘날 정치적 격변이 선거장 안에서만 완결되지 않고 금융시장과 국가 신뢰의 영역으로 즉각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불과 2019년 총선까지만 해도 보수당과 노동당의 합산 득표율은 약 75%에 달했다. 그 수치가 이제 과거의 것이 됐다. 자유민주당, 스코틀랜드국민당(SNP), 플라이드 컴리, 녹색당, 영국개혁당까지 — 다당 경쟁 구도가 현실이 됐다. 영국 정치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
한국 정치에 던지는 함의가 가볍지 않다.
지방선거를 앞둔 한국에서도 양대 정당에 대한 피로감은 이미 누적됐다. 여당에 대한 실망이 야당 지지로 곧장 전환되지 않고, 야당에 대한 불신 역시 여당의 안정적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중도층은 빠르게 부동(浮動)하고 있고 청년층은 냉소적이다. 지역 민심은 이념보다 생활 문제에 민감해진 지 오래다.
영국의 경고는 명확하다. 거대 정당의 역사와 조직과 간판만으로는 더 이상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 유권자들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내 삶을 바꿀 수 있는가'를 묻는다. 물가를 잡을 수 있는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가, 주거 불안을 줄일 수 있는가,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오래된 정당도 순식간에 낡은 체제가 된다.
지방선거는 생활 정치의 무대다. 교통, 주거, 교육, 돌봄, 안전, 지역경제 같은 문제가 중앙의 거대 담론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표심을 움직인다. 영국에서 쓰레기 수거와 공공주택, 지역 복지 문제가 전국적 분노와 연결됐듯, 한국에서도 민생 불안은 언제든 정치 지형을 흔드는 변수로 폭발할 수 있다.
어제의 압승은 오늘의 오만이 되고, 오늘의 패배는 내일의 반전 출발점이 된다.
영국에서는 그 반전의 문이 영국개혁당과 녹색당을 향해 열렸다. 한국에서 그 문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진영 결집에만 기대어 민생의 신호를 외면한다면, 유권자는 반드시 또 다른 방식으로 답할 것이다.
민심은 빌려 쓰는 것이다. 결코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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