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좋아도 국내 공장 안 짓는다"… 기업 설비투자, '효율'보다 '지정학'이 좌우

  • 한은, 경제안보 패러다임 부상 및 韓 구조 전환 보고서

  • 설비투자 시 안보·글로벌 요인 2020년 이후 44% 육박

  • 기업 수익→투자→고용·소득 창출 '선순환' 고리 약화

서울 중구 소재 한국은행 전경 사진연합뉴스
서울 중구 소재 한국은행 전경 [사진=연합뉴스]

우리 기업들의 설비투자 결정 방식이 효율성 위주에서 안보까지 함께 고려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경기가 좋아도 공장을 안 짓고, 경기가 나빠도 짓는 일이 생기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전세계적으로 '경제안보' 패러다임이 부상하는 만큼 국내 제조·수출 기반이 약화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행 조사국이 31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이후 미·중 패권경쟁, 팬데믹 공급망 병목,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기업의 투자 결정 기준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가동률·금리·수출 등 전통적 경기 변수가 설비투자를 좌우했지만, 이제는 무역정책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주요 변수로 자리 잡았다. 안보·글로벌 요인이 설비투자 변동에 기여하는 비중은 2020년 이전 평균 29.6%에서 이후 43.9%로 14.3%포인트 확대됐다.

특히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반도체·자동차 제조업의 경우 안보· 글로벌 요인이 투자 변동에 기여하는 비중은 2016~2019년 평균 33.1%에서 2020년 이후 평균 48.7%로 약 15.7%포인트 상승해 시장·경기 요인과 거의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자동차 산업은 더 극적이다. 같은 기간 안보·글로벌 요인 비중이 25.9%에서 50.9%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법 시행 이후 국내 완성차·배터리 기업들이 국내 투자보다 미국 현지 공장 건설을 택한 흐름이 숫자로 확인된 것이다.

 
사진한국은행
한국은행이 분석한 경제안보 패러다임 부상과 영향. [사진=한국은행]

문제는 이 구조적 전환이 국내 거시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해외직접투자가 빠르게 늘면서 수출이 증가해도 국내 설비투자 확대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약해지고 있다.

설비투자의 수출 민감도는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며, 민간투자 1원당 국내 부가가치 유발 효과도 2020년 이후 줄어드는 추세다. 수출 호조, 국내 투자 확대, 고용·소득 증가라는 전통적 선순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은은 해외직접투자 확대를 단순한 자본 유출로만 볼 수는 없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기술 패권의 중심인 '이너서클'로 진입하기 위한 전략적 이동의 성격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기업들이 선진국 현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자국 우선주의 보조금 수혜를 확보하는 동시에 높아지는 비관세 무역 장벽을 효과적으로 우회하고 있다. 또 첨단 기술 생태계 접근 등 글로벌 공급망 핵심부로 진입하기 위한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해외직접투자의 증가는 대외순자산 축적을 통해 국가 신인도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봤다. 대외순자산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높은 수준으로 축적되면 국가 신용등급을 안정시키는 요인이 된다.

한은은 패러다임 전환이 국내 제조·수출 기반 약화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핵심 제조공정과 연구개발(R&D)의 국내 잔류 유인을 높이는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투자의 문법이 바뀐 만큼, 정책의 문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유럽연합(EU)·중국·일본 등 주요국이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산업에 대규모 직접 지원을 경쟁적으로 확대 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세제지원, 클러스터 조성, 금융지원, 기술보호를 축으로 한 첨단산업 육성 체계를 본격화하고 있다.

한은은 현재의 간접 지원 방식으로는 투자 공동화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의 직접 보조금 390억달러, 일본의 TSMC 유치 보조금 10조7000억원 등과 비교할 때 지원의 즉각성·규모 면에서 제약이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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