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하나는 정치의 광장이다. 지방선거 과정에서 일부 지역의 투표용지 부족 논란을 계기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가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흘 넘게 계속되고 있다. 사안에 대한 사실관계와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지 않은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축제의 광장이다. 당초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월드컵 축구대회가 뜻밖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서울시청 앞 광장은 다시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한국 대표팀의 선전이 이어지자 전국 곳곳에서 응원전이 펼쳐졌고, 사람들은 오랜만에 거리에서 함께 환호했다. 2002년 월드컵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겉으로 보면 두 광장은 완전히 다르다. 한쪽은 항의와 요구의 공간이고 다른 한쪽은 환호와 축제의 공간이다. 하나는 정치이고 하나는 스포츠다. 하나는 불만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두 광장은 의외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괜찮은가.”
정치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를 묻는다. 축제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함께 꿈꿀 수 있는 공동체인지를 확인한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두 광장 모두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두 개의 광장 심리를 읽어야 한다.
적절한 비유로 압력솥을 생각해 본다. 뚜껑 아래에서는 저출산과 고령화, 청년실업, 높은 주택가격, 국가적 규모의 가계부채, 세대갈등, 지역격차,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일자리 불안, 자산격차 확대 등 압력이 계속 쌓이고 있다. 하나하나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들인데 이들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사회 내부에 긴장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압력솥 바깥에서 보이는 숫자는 오히려 좋아 보인다. 수출은 증가하고 무역수지는 흑자를 기록한다. 증시는 상승하고 코스피는 새로운 고점을 향해 움직인다.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한다. 정부와 언론은 각종 경제지표의 개선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이 그 숫자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기 시작한다. “나라는 잘된다는데 왜 내 삶은 불안하지?”
거시경제와 체감경제의 간극이 드러나고 있음을 상징하는 구절이다. 국가 전체의 평균은 좋아지고 있는데 국민 개개인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현상이다. 최근 서울에서 동시에 나타난 두 개의 광장은 어쩌면 바로 이 압력솥 안에 쌓여가는 사회적 에너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분출되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청년들은 취업과 주거를 걱정한다. 중산층은 자녀 교육비와 노후를 걱정한다. 자영업자는 매출 감소와 부채를 걱정한다.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를 걱정한다. 국가 전체의 숫자는 좋아지고 있는데 개인의 체감은 나아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성장과 분배의 괴리, 자산시장과 실물경제의 괴리, 거시경제와 미시경제의 괴리로 설명한다. 이를 국민의 언어로 번역한 게 바로 ‘나라는 좋아진다는데 왜 내 삶은 불안한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어떤 정부도 성공하기 어렵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많은 국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경제성장은 지속되는데 사회적 불만은 오히려 커지는 현상이다. 평균값은 상승하는데 시민들의 체감은 정반대로 움직이는 경우다.
지금 한국이 이러한 전환점에 서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전형적인 K자 구조를 보이고 있다. AI, 반도체, 금융, 수출 대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반면 자영업, 지방경제, 청년층, 일부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같은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경제가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나 스포츠 이벤트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강조하건대 정권 집회는 단순히 투표용지 문제만이 아니다. 청년세대가 느끼는 정치적 소외감과 미래 불안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월드컵 응원 역시 단순한 축구 열풍만이 아니다. 공동체적 자부심과 희망을 확인하려는 사회적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두 광장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래라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숫자의 경제에서 체감의 경제로 시선을 옮기는 일이다. 성장률도 중요하다. 수출도 중요하다. 주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민이 체감하는 일자리, 소득, 주거, 교육, 지역경제, 사회적 이동성,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함께 개선되지 않으면 경제성장의 성과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바로 여기서 출범 2년 차를 맞은 이재명 정부의 과제가 등장한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 집권 첫해를 지나 두 번째 해로 들어가고 있다. 지난 1년이 방향을 설정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결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시기다. 정치적으로 보면 앞으로 약 2년은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드문 시간대다. 한국 정치에서 이런 시기는 흔치 않다. 선거가 다가오면 모든 정부는 단기 성과와 정치적 계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구조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존재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혁의 내용만큼이나 개혁을 추진할 체계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수많은 국가전략을 발표했다. AI 3대 강국, 첨단산업 육성, 저출산 대응, 지역균형발전, 우주항공 강국, 에너지 전환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과제가 없다. 문제는 전략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략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AI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제이고, 제조혁신은 산업통상부의 과제이며, 인재양성은 교육부의 과제이고, 지역발전은 국토교통부의 과제라는 식의 부처별 접근으로는 국가적 전환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오늘날의 도전은 하나의 부처가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 국무총리 교체와 새로운 내각 구성이 논의되는 지금은 국정운영 체계를 재설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필자는 새 총리를 중심으로 한 ‘국가전환전략회의’ 설치를 제안하고 싶다. 이 회의는 단순한 부처 협의체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 생산능력과 국민 체감경제를 동시에 다루는 최고 수준의 전략조정기구가 되어야 한다. AI, 첨단제조업, 에너지, 금융, 인재, 지역균형발전, 저출산 대응을 하나의 국가전환 프로젝트로 묶어 관리해야 한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교육개혁과 연결되어 있고, 교육개혁은 AI 산업전략과 연결되어 있으며, AI 산업전략은 전력과 에너지 정책으로 이어진다. 지역소멸 문제는 산업입지 정책과 연결되고, 산업입지 정책은 교통·주거·인재정책과 연결된다. 오늘날 국가가 직면한 문제는 서로 얽혀 있으며 개별 부처 단위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한국이 필요한 것은 개별 정책의 추가가 아니라 국가 전체를 하나의 지도 위에 올려놓고 바라볼 수 있는 통합 사령탑이다.
앞으로 2년은 선거가 없는 정치적 골든타임이다. 이 시간을 단순한 관리의 시간으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모델을 설계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청년이다. 청년들은 한국의 미래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불안을 안고 있는 세대다. 일자리와 주거, 결혼과 출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청년정책은 더 이상 복지정책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AI 시대의 교육, 창업, 기술훈련, 사회적 이동성을 포괄하는 국가전략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과제는 AI와 산업전환이다. 우리는 AI를 단순한 디지털 기술로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AI는 전력망, 데이터센터, 반도체, 소프트웨어, 제조업, 국방, 교육, 의료를 모두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 인프라다. 과거 고속도로와 철도가 산업화를 이끌었다면 앞으로는 AI 인프라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다.
세 번째 과제는 사회적 신뢰 회복이다. 경제는 결국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선거에 대한 신뢰, 정부에 대한 신뢰, 시장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경제지표가 좋아져도 국민은 불안해진다.
최근 두 개의 광장이 보여주는 것도 결국 신뢰의 문제다. 국민들은 정치의 광장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존중받기를 원한다. 축제의 광장에서는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원한다.
결국 국가 운영도 마찬가지다. 국민은 정부가 성장률 몇 퍼센트를 달성했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안정되었는지는 기억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통계가 아니다. 더 많은 확신이다. 두 개의 광장이 보내는 신호는 단순하지 않다. 국민은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확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 2년 차의 과제는 경제지표를 조금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다시 미래를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새 총리 체제와 함께 국가전환전략회의와 같은 강력한 통합 거버넌스를 구축해 AI 대전환, 산업혁신, 청년미래, 지역재생을 하나의 국가 프로젝트로 묶어낼 수 있다면 지금의 2년은 단순한 임기 중반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새로운 10년을 여는 출발점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숫자의 경제를 체감의 경제로 바꾸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며, 이재명 정부 2년 차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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