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판을 새로 짜자] 특별기획 칼럼 ③ 반도체 호황에 취해 있을 시간이 없다

  • 성장의 착시를 넘어 대한민국 경제 다시 설계해야

최근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을 잇달아 상향 조정하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고 인공지능(AI) 혁명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주식시장도 활기를 되찾고 있다. 정부는 성장률 전망을 높이고 있고 국제기구들 역시 한국 경제가 예상보다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한다.

겉으로만 보면 대한민국 경제는 다시 성장의 궤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리의 풍경은 다르다. 자영업자는 손님이 줄었다고 말하고, 중소기업은 인력난과 비용 부담을 호소한다. 지방 산업단지에는 빈 공장이 늘어나고 있고 청년들은 여전히 취업과 주거 문제로 고민한다. 경제성장률은 오르는데 국민들의 체감경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지금 대한민국 경제는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엔진은 단연 반도체 산업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AI 시대의 핵심 부품인 HBM 시장에서도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의 AI 플랫폼 기업들이 성장할수록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수출 증가의 상당 부분은 반도체가 이끌고 있다. 기업 실적 역시 반도체 업종에 집중되고 있다. 코스피 상승세의 중심에도 반도체가 있다. AI 혁명이 시작되면서 세계 자본은 다시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반도체가 잘된다고 해서 대한민국 경제 전체가 건강하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경제는 지금 두 개의 경제로 나뉘고 있다. 반도체와 첨단산업이 이끄는 수출 경제와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생활 경제가 동시에 존재한다. 일부 대기업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지만 상당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생존을 걱정한다. 수도권은 성장하지만 지방은 인구 감소와 산업 공동화에 직면해 있다.

마치 거대한 배의 엔진실은 최고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데 객실 곳곳에서는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여러 경제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경제성장률은 개선되고 있지만 소비 회복 속도는 더디다. 수출은 증가하고 있지만 고용과 내수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과거보다 약해지고 있다. 반도체를 제외한 제조업의 체감 경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목소리가 많다.

대한민국 경제의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이 성장의 착시다.

성장률 수치가 좋아 보인다고 해서 경제 체질까지 건강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산업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경제는 외부 충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 과거 대한민국은 조선과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새로운 산업이 차례로 성장하며 경제 전체를 견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도체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

만약 반도체 경기가 꺾인다면 어떻게 될까. AI 산업 성장 속도가 둔화되거나 글로벌 공급망이 변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 경제는 다시 성장 둔화의 벽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잠재성장률이다.

한국은행과 주요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이미 1%대로 떨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저출산, 고령화, 생산성 둔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노동력 증가와 설비 투자 확대만으로 경제를 성장시키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은 사람이 많았다. 민주화 이후에는 생산성이 높아졌다. 정보화 시대에는 반도체와 ICT 산업이 성장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상황이 다르다. 인구는 줄어들고 성장 여력은 약해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성공 방정식만으로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결국 대한민국 경제는 새로운 성장 모델을 찾아야 한다.

AI 혁명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다. 많은 사람들이 AI를 하나의 기술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산업 구조 전체를 바꾸는 거대한 변화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만들었고 전기가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으며 인터넷이 정보혁명을 이끌었다면 AI는 인간의 지적 노동과 산업 운영 체계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제조업 강국이다. 자동차와 조선, 철강, 기계, 전자산업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 역량을 갖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제조업과 AI의 결합이다.

AI를 활용한 스마트 공장, 자율제조 시스템, 첨단 물류 체계, 로봇 산업은 대한민국이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다. 반도체 강국을 넘어 AI 활용 강국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물리적 세계와 AI가 결합하는 피지컬 AI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지역 경제 전략도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기업과 인재, 자본은 수도권으로 몰리고 지방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직면했다. 일부 지역은 소멸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과장이 아닐 정도로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AI 시대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 재생에너지 산업은 반드시 서울에만 있어야 하는 산업이 아니다. 오히려 넓은 부지와 풍부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지방이 경쟁력을 가질 수도 있다.

이제 지방을 지원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미래 성장 거점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국가균형발전 역시 복지 정책이 아니라 성장 전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청년 문제도 경제의 문제다.

최근 청년들은 집을 사기 위해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포기한다. 취업에 성공해도 자산 형성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세대 문제가 아니다. 경제 시스템의 문제다.

청년들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나라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결혼과 출산이 줄어드는 것도, 소비가 위축되는 것도 결국 경제 구조와 연결돼 있다. 경제 정책은 성장률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희망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에너지 문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AI 강국이 되려면 동시에 에너지 강국이 되어야 한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송배전망과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포함한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산업과 인구, 지역과 에너지는 서로 분리된 문제가 아니다. 모두 연결된 하나의 국가 경쟁력 문제다.

결국 대한민국 경제가 직면한 과제는 명확하다.

반도체 의존 경제에서 혁신 경제로, 수도권 중심 경제에서 균형 성장 경제로, 노동 투입형 경제에서 생산성 중심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성장의 과실이 특정 산업과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구조를 넘어 경제 전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산업화는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구했다. 민주화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반도체는 대한민국을 기술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미래는 과거의 성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 앞에 놓인 진짜 과제는 성장률 숫자를 높이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20년, 30년 뒤에도 지속 가능한 경제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경제의 판을 새로 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변화의 순간마다 새로운 선택을 요구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또 한 번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반도체 호황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AI 시대를 준비하며 새로운 성장 엔진을 만들 것인가.

앞으로 5년은 경기 사이클을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다. 앞으로 50년 대한민국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간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냉정한 현실 인식과 과감한 설계다. 대한민국 경제의 판을 새로 짜야 할 시간이다.
 

이미지 챗GPT 생성
이미지= 챗GPT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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