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의 심리렌즈] 두 기자는 왜 손흥민을 욕했을까?

  • 허세·경험 독점·고생의 권력화로 읽는 손흥민 욕설 논란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 사진연합뉴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 [사진=연합뉴스]

손흥민을 향한 취재진의 욕설 파문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훈련을 지켜보던 두 기자가 손흥민에게 여과 없는 말을 뱉었고, 그 음성이 카메라에 고스라히 담긴 것. 해당 영상이 확산되며 논란이 커지자 JTBC 측은 영상을 비공개 처리한 뒤 발언이 삭제된 편집본을 재게시했다.

이번 논란을 들여다보기 전 분명히 해둘 점은, 우리가 두 남성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손흥민에게 열등감을 느꼈는지, 병역 특례에 반발심을 풀었는지, 현장에서 어떤 불만을 겪었는지 단정할 수 없다.

업계 밖에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기자라는 직업을 재판하기 위해 두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려는 것도 아니다. 비슷한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그들의 감정을 추측해볼 뿐이다. 취재 대상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 현장을 안다는 자부심, 팬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모든 게 어느 순간 냉소로 흐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가까이서 보고 평가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마음을, 본인을 포함해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말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에는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 자존심을 지키는 습관이 묻어난다. 대화 속 그들은 손흥민의 슈팅이나 경기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꺼낸 말은 '군대'였다.

 
손흥민을 향한 취재진의 욕설이 담긴 영상 사진사회관계망서비스
손흥민을 향한 취재진의 욕설이 담긴 영상 [사진=사회관계망서비스]


"주장이라고 소대장 뛰듯이 뛰는 건가."
"군대도 안 갔다 온 XX들이."
"군대의 '군' 자도 모르는 XX들."


짧은 대화지만 꽤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축구장의 주장을 병영의 소대장으로 바꾸는 시선, 군필 경험을 도덕적 우위처럼 사용하는 태도, 압도적인 스타를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좁은 기준 안으로 끌어들이는 심리, 남성들끼리 서로 으스대며 조롱을 주고받는 문화까지.

단순한 설명을 할 수도 있다. 현장은 덥고, 대기는 길었을 수 있다. 월드컵 현장 취재는 피곤할 수 있다. 낯선 도시, 빡빡한 동선, 제한된 접근, 취재 경쟁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더위와 피로는 말의 문턱을 낮춘다. 평소라면 속으로 삼켰을 짜증이 입 밖으로 새어나올 수 있다.

하지만 날씨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불쾌감이 있었다면 그건 왜 하필 군대의 언어로 나왔을까. 피곤했다면 왜 그 피곤함은 국가대표 주장에게, 그것도 병역 경험을 조롱하는 말로 이어졌을까.
 
▲ 냉소를 전문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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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직업적으로 대상을 가까이서 본다. 훈련장을 보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표정을 읽고, 몸짓을 관찰한다. 반복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평가는 때때로 이상한 착각을 만든다.

'나는 팬이 아니다.'
'나는 저 사람을 안다.'
'나는 저 사람의 민낯을 본다.'

건강한 거리감일 수 있다. 기자는 팬처럼 감탄만 해서는 안 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보고,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감탄하지 않는 태도를 전문성으로 착각하고, 냉소를 통찰처럼 여기게 된다. 팬은 감탄하고 기자는 판단한다고 믿는 것이다.

가까이서 본다는 게 더 깊이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복적인 관찰은 사람을 대상화하기 쉽다. 선수는 사람이 아닌 기사 재료가 되고, 인터뷰이는 코멘트 공급원이 되고, 스타는 취재 동선 안의 자원이 된다.

손흥민 같은 선수는 더 그렇다. 그는 한국 축구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기사와 조회수의 원천이다. 기자는 그에게 기대어 기사를 쓴다. 손흥민이 뛰어야 기사가 나오고, 손흥민이 말해야 멘트가 생기고, 손흥민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독자의 눈길이 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존하는 존재 아래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재 대상에게 기대면서도 말로는 그를 낮춘다. 그를 작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작지 않다고 느끼려 할 수 있다. 전문가 의식의 그림자다.

취재권은 권력이 아니고, 접근권은 우월감의 근거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이 자주 보는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익숙함은 존경을 무디게 만든다. 선수와 같은 공간에 있고, 훈련을 보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경기 전후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면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라는 착각을 가진다.

손흥민을 향한 조롱 역시 취재 대상에게 의존하면서도 그 위에 서고 싶은 직업적 이중감정이 드러난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 허세의 본질: 타인을 낮춰야 겨우 서는 자존감

손흥민은 한국 축구에서 너무도 큰 이름이다. 대표팀 주장이자 한국 축구의 얼굴이고, 세계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해온 선수다. 그런 사람을 정면으로 깎아내리기는 쉽지 않다. 축구 실력으로 공격하기도 어렵고, 커리어로 무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른 기준을 찾는다.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기준, 적어도 자기 안에서는 "그래도 이건 내가 더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 두 기자에겐 그 기준이 군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감은 남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서지만, 허세는 누군가를 낮춰야 선다. "나는 군대 갔다 왔다"는 말이 건강한 자부심이라면 타인을 욕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불안정하면 과시가 된다. 더 세게, 거칠게, 낮잡아 말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인된다.

손흥민이 별것 아니어서 조롱한 게 아니라, 너무 큰 사람이라서 조롱해야 했을 수 있다. 누군가를 인정하면 내가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상대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대신 흠집을 찾고, 그 흠집을 확대한다. 그리곤 말한다.

"그래도 저 사람은 이걸 모르잖아."

그들은 손흥민을 낮춰서 자신을 높이려 했던 게 아니라, 어쩌면 이미 작아진 자신을 견디기 위해 손흥민을 낮춰야 했을지도 모른다.
 
▲ 경험 독점 심리

"주장이라고 소대장 뛰듯이 뛰는 건가"라는 말은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말은 손흥민을 축구대표팀 주장으로 보지 않는다. 발화자는 손흥민을 자신에게 익숙한 병영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축구장의 주장은 그의 입에서 소대장이 되고, 월드클래스 선수의 몸짓은 군대식 조롱 코드가 된다.

이어진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은 손흥민의 자격을 빼앗는 말이다. "너는 우리가 겪은 세계를 모른다", "너는 그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완전히 인정받을 수 없다"는 식의 서열 의식이 깔려 있다.

손흥민이 축구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뤘든, 이 말 안에서 그는 '군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축소된다.

경험 독점 심리는 내가 겪은 것이 진짜 고생이고, 내가 아는 것이 진짜 세계이며,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것을 모르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태도로 나온다.

"군대의 '군' 자도 모르는"이라는 표현은 상대의 무지를 선언한다. 손흥민의 축구 인생, 훈련, 책임감, 압박감, 국가대표로서의 희생은 지워진다. 남는 건 하나다.

"너는 우리가 겪은 군대를 모른다."

두 기자는 손흥민의 커리어를 부정하기 어려웠을 테다. 대신 자신들이 독점한 경험을 꺼냈다. 병역 문제는 손흥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소재였을지 모른다. 축구장에서는 손흥민이 주장이지만, 군대 이야기에서는 자신들이 선임이 된다.
 
▲ 고생의 권력화

군대는 어떤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말할 만한 고생담이 되고, 자기 정체성을 지탱하는 자부심이 된다. 단 그 자부심이 타인을 내려치는 도구가 될 때, 고생은 기억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군대는 억울함이면서 자랑이고, 고생이면서 훈장이고, 상처이면서 자격증이다. '내가 그걸 견뎠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 '그러니 나는 말할 수 있다'는 권한이 된다.

군 경험이 자기 내부에서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고 느낄수록, 그 경험을 더 세게 붙든다. 내가 겪은 고생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면 너무 허무하니, 그 고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군대를 도덕적 자산으로 만든다.

그런 사람에게 병역 특례를 받은 스타는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군대에 오래 가지 않았는데도 사랑받는다. 내가 겪은 시간을 겪지 않았는데도 박수받는다. 그는 국민적 영웅이고, 나는 평범한 군필자다. 이 비교는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한다.

이런 감정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감의 얼굴로 누군가를 응징하려 한다.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은 그렇게 박탈감을 도덕적 비난으로 포장한다.

손흥민은 한국 축구를 위해 뛰었고, 국제대회 성과로 병역 특례를 받았다. 법과 제도 안에서 주어진 혜택이다. 제도적으로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모두가 납득하는 건 아니지만.

특히 군대처럼 개인의 청춘, 시간, 자존심, 억울함이 뒤엉킨 경험에서는 더 그렇다. 누군가의 특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생이 무가치해지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손흥민의 성취를 인정하는 대신, 그를 "군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나온다.
 
▲ 남성들끼리 주고받는 공모의 말

이번 대화가 혼잣말이 아니라 두 기자의 주고받기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소대장 뛰듯이"라는 군대 농담의 문을 열자, 다른 사람은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로 수위를 올린다. 누군가를 같이 비웃는 동안, 두 사람은 같은 편이 된다.

"너도 알지?"
"우리끼리는 통하지?"
"우리는 저 세계를 알잖아"

이들의 말은 서로를 향해 있었다. 이때 손흥민은 두 남성이 자기들끼리 유대를 확인하는 재료가 된다.

군대 농담은 이런 방식으로 자주 쓰인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 사이에서는 몇 마디만으로도 공통의 기억이 열린다. 소대장, 간부, 뜀걸음, 얼차려, 점호 같은 말들…설명이 필요 없다. 남성들 사이의 빠른 접속 코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농담에서 그치는 편이 낫다. 사적인 유대 언어가 공적 현장에서, 선수 개인을 향한 조롱으로 튀어나올 때 그건 더이상 농담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공모는 수위를 키운다. 혼자였다면 지나쳤을 말이 옆 사람의 반응을 만나 더 거칠어진다. 첫 발언은 장난처럼 시작됐을 수 있다. 두 번째 발언은 그 장난에 욕설을 얹었다. 농담이 조롱이 되고, 조롱이 모욕이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 무대 뒤의 언어

이 사건이 더 씁쓸한 이유는 발언자들이 그 말을 사담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옆 사람과 툭 던지는 말, 현장 주변에서 흘러가는 농담…하지만 사적인 말이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무대 뒤라고 믿었던 말이 무대 앞으로 흘러나온 이번의 사건에는 손흥민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국가대표 주장이 아니라 병영 농담의 소재, 세계적 선수가 아니라 군대를 모르는 사람. 영상에 담긴 건 그 시선이었다.

손흥민은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너무 큰 사람이었을 것이다. 너무 멀리 있고, 너무 많은 박수를 받고,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그래서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세계로 끌고 들어왔다. 그 세계의 이름은 군대였고, 어쩌면 현장이었고, 어쩌면 기자라는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두 남성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말은 들을 수 있다. 그 말에는 피로와 불만, 허세가 뒤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 감정은 손흥민을 깎아내리는 말로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손흥민보다, 그 말을 뱉은 사람들의 세계를 더 많이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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