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잘 벼린 축제 하나가 도시를 먹여 살린다

차민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차민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올해 80주년을 맞은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이 공식 초청 언어로 '한국어'를 선정했다. 영어·스페인어·아랍어에 이은 네 번째이자 아시아 언어로는 처음이다. 공식 초청작 47편 가운데 한국 작품이 9편에 이른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낭독극 '새', 아시아인 최초 국제입센상 수상자 구자하의 연작 등이 교황청 궁전 무대에 오른다. 한국 작품의 아비뇽 공식 초청은 1998년 이후 28년 만이다.

축하할 일이지만,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화려한 출연진이 아니라 그 축제를 만들어온 방식이다. 아비뇽과 영국 에든버러, 미국 오스틴(SXSW). 세계 최고의 축제도시로 꼽히는 이 세 곳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도를 펴보면 아비뇽은 파리에서 700km, 에든버러는 런던에서 650km, 오스틴은 뉴욕에서 2800km 떨어진 변방이다. 그리고 셋 모두 축제를 위해 무언가를 새로 짓지 않았다.

1947년 연출가 장 빌라르가 주목한 것은 파리의 극장이 아니라 아비뇽에 버려져 있던 14세기 교황청 궁전이었다. 유폐와 분열의 역사가 새겨진 낡은 성벽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야외무대였고, 프로방스의 여름밤은 무료 조명이었다. 역사의 상처를 예술의 배경으로 뒤집은 이 '달리 보기' 하나로 인구 9만의 소도시는 공식 초청작(IN)과 자유참가작(OFF) 1600여 편이 3주간 도시 전체를 극장으로 바꾸는 연 6000만 유로 규모의 공연예술 수도가 됐다.

같은 해 영국의 에든버러에서는 국제페스티벌에 초청받지 못한 8개 극단이 공연장 주변부(fringe)의 교회와 창고, 골목에 무대를 열었다. 주최 측은 이들을 배제하지 않고 제도로 품었다. 심사도 초청도 없는 이 개방성이 화산암 절벽 위 중세 도시 전체를 무대로 바꿔, 세계의 프로듀서가 신작을 사러 오는 최대 공연예술시장이자 연 8억5200만 파운드(약 1조5000억원) 규모의 경제 엔진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오스틴은 그 현대판이다. 1987년 지역 주간지 기자들이 '우리 동네 밴드를 알리자'며 시작한 SXSW는 시내 600여 개 라이브클럽과 술집을 그대로 무대로 썼다. 시(市)는 1991년 '세계 라이브 음악의 수도'를 도시 슬로건으로 채택했고, 축제는 2024년 3억7700만 달러(약 5600억원)의 경제효과와 30만 명의 방문객을 창출했다. 주목할 것은 순환 구조다. 축제 기간 걷힌 숙박세 일부가 지역 뮤지션 지원기금으로 환류돼 관광 수입이 다시 창작 생태계를 키운다.

성공방정식은 둘로 요약된다. 첫째, 하드웨어가 아니라 관점이다. 궁전도 성곽도 술집 골목도 축제 이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무대로 읽어낸 스토리텔링과 브랜딩뿐이다.

둘째, 전문성과 시민성의 결합이다. 예술가·기획자·크리에이터가 판을 설계하고, 숙소를 내주는 주민과 공간을 여는 상인이 실행을 떠받쳤다. 이 결합이 창작 활성화, 공동체 형성, 경제 활력, 도시 브랜딩이라는 네 겹의 파급효과를 낳았다.

미증유의 K컬처 파워를 날마다 체감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축제는 어떠한가. 많은 경우 축제를 여전히 '주민에 대한 시혜적 행사'로 보는 타성이 남아 있다. 기획보다 의전, 단기적 성과가 앞서다보니 비슷한 축제가 생겼다 사라진다. 나라살림연구소에 따르면 2025년 지역축제는 1214개로 2019년(884개) 대비 37.3% 늘었고, 10억원 이상 대형 축제는 75개에서 149개로 두 배가 됐다. 그러나 외부 방문객이 21.1% 느는 동안 1인당 소비액 증가율은 0%대에 머물렀고, 지역주민 참여율은 평균 8.6%포인트 감소했다. 예산은 커지는데 효과는 옅어지는 구조다.

네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지원 단위를 '행사'에서 '협의체'로 바꾸자. 예술감독·크리에이터가 판을 설계하고 주민·상인이 실행하는 지역 협의체를 지원 대상으로 삼아, 지자체가 다년도 지원 대상을 선정하고 중앙정부는 지자체·지역주민과 협약을 맺어 3~5년간 지속 지원하는 방식이다.

둘째, 검증 체계를 세우자. 방문객 수, 1인당 소비액, 주민 참여율을 공통 지표로 의무 공시하고, 연말 '대한민국 축제성과발표회'에서 공개 비교해 우수 사례를 확산해야 한다. 1차년도에는 시범 협의체 10곳으로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셋째, 축제 수익 일부를 지역 창작·발전기금으로 환류시키는 법·제도를 마련하자. 오스틴의 숙박세 환류처럼 축제가 소비로 끝나지 않고 달리보기의 원천인 창작에 재투자되는 순환이 만들어진다.

넷째, 공공과 민간의 역할을 제도로 나누자. 아비뇽은 공공이 심사·투자하는 IN과 극장·극단이 2006년 설립한 민간협회(AF&C)가 운영하는 OFF로 이원화돼 있고, 에든버러 프린지 소사이어티는 프로그래밍도 공연장 운영도 하지 않은 채 매표·홍보·예술가 지원이라는 공통 인프라만 맡는다. SXSW는 민간이 기획·운영하고 시는 인허가와 도시 브랜딩을 담당한다. 공공은 인프라와 검증을, 민간은 기획과 운영을 맡는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

잘 벼려진 축제 하나는 관광·숙박·요식을 잇는 지역경제의 엔진이자 K컬처를 세계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된다. 그 힘은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자원을 달리 보는 관점의 깊이와 그것을 함께 실행하는 시민의 손에서 나온다. 축제의 숫자가 아니라 밀도가 도시를 먹여 살린다. 변방의 세 도시가 80년째 들려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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