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자투리 리뷰] 한국에 온 뱀파이어에 현혹 당할 준비

과거 단관극장에는 지정좌석이 없었다. 관객은 표가 있으면 마음에 드는 자리에 자유롭게 앉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인기가 많은 영화는 좌석수보다 많은 티켓이 발권되기도 했다. 일부 관객은 입석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다.

A양은 그날 영화 시작 시간보다 좀 늦게 극장에 도착했나보다. 빈 자리가 안 보여 할 수 없이 뒤쪽에 서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속이 메스껍고 멀미가 나는 것 같았지만 끝까지 관람을 완료했다. 이날 A양이 본 영화의 제목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였다.

당시 서서 본 영화를 본 관객은 A양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여중생, 여고생이 극장 안에 말 그대로 바글바글했다(현재 이 영화의 관람 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지만 국내 개봉 당시에는 3분여를 삭제한 후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수많은 소녀들이 그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극장에 몰려든 이유는 단연코 배우 때문이다.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촬영했을 당시 나이가 각각 32세, 31세다. 지구에서 잘 생긴 남자 배우를 손에 꼽으라면 무조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배우들이다.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게 더 힘든 시절이었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사진IMDB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사진=IMDB]

‘뱀파이어’라는 서양 고전의 캐릭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지금까지도 꾸준히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뱀파이어에게 부여된 몇 가지 설정이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에 전염되면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로 바뀌어 본래 얼굴에서 가능한 한 최대치로 잘생겨지거나 예뻐진다. 초능력이 아닌가 싶은 강력한 물리적 힘을 갖게 되고 빠른 치유 능력이 생겨 다치는 법이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전염된 그 상태로 절대 늙지 않고 영생한다는 점이다. 수백 수천년을 살게 되니 자연스레 지성까지 갖추게 된다. 뱀파이어는 수려한 외모에 교양과 우아함을 갖췄을 뿐 아니라 사냥감을 매혹시킬만큼 섹시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매력적인 동시에 그 매력을 상쇄하고도 남는 두려운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의 주식(主食이)은 오로지 동물의 혈액뿐이라 생존하려면 반드시 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중 혈기왕성한 인간의 혈액이 뱀파이어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유지하는 데 가장 좋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살인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뱀파이어는 흔히 빌런, 악의 화신, 적대적 크리쳐 등으로 주로 공포영화에서 활약하게 되어 있다.
 
빌런의 정체성을 숙명처럼 떠안은 비련의 캐릭터. 콘텐츠의 창작자라면 이 가상의 매혹적인 캐릭터가 욕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루마니아에서 발원했다는 ‘뱀파이어’는 마침내 동북아에 상륙, 대한민국에까지 왔다.
 
영화 박쥐 사진CJ ENM
영화 '박쥐' [사진=CJ ENM]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뱀파이어가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영화는 1982년에 만들어진 ‘관 속의 드라큐라’라고 한다. 이후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더러 뱀파이어가 등장하곤 했으나 한국 대중에게 인상적으로 각인된 뱀파이어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서부터 아닌가 싶다.

영화 ‘박쥐’는 간단히 요약하면, 신실한 신부 상현(송강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다 못해 이 병을 낫게 할 백신 실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목숨을 잃기 직전, 모종의 피를 수혈 받은 후 뱀파이어가 돼버린 이야기다.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의 얼굴을 했던 뱀파이어가 대서양을 지나 태평양을 건너왔더니 송강호가 된 현실은 어떤 왕년의 소녀에게는 슬픈 일일 수도 있겠으나 한국에서 그려낸 뱀파이어 이야기는 결코 물렁하지 않다.
 
영화 박쥐 사진IMDB
영화 '박쥐' [사진=IMDB]

영화 ‘박쥐’는 박찬욱 감독의 2009년작이다. 좀 모자란 아빠(‘괴물’)로 생계형 조폭(‘우아한 세계’)으로 이상한 사기꾼(‘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친근한 아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송강호는 그의 필모 사상 가장 섹시한 모습으로 ‘박쥐’에서 열연했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 “걸작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든 영화 중에서는 제일 낫다”고 개봉 당시 이야기했을 만큼 관객들에게, 그리고 평단에서 박찬욱 감독 필모 중 최고로 곧잘 꼽히곤 하는 작품이다.
 

상현 : "사제가 이러면 죄가 더 커요"
태주 : "난 신앙이 없어서 지옥 안 가요"

 
한국에서 생겨난 뱀파이어는 원래 신부였다는 설정의 아이러니가 더해져 상현의 분출하는 욕망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영화를 보며 추측컨대 박찬욱 감독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내면의 ‘모범생’과 ‘흡혈귀’ 같은 욕망이 종종 갈등을 일으켜왔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것이 드디어 영화 ‘박쥐’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는데, 결국 ‘모범생’ 상현은 흡혈귀의 피를 수혈받고 모처럼 드러난 욕망을 태주(김옥빈)에게 집중시켜 발현하고 만끽한다. 이 상현의 욕망이 태주의 욕망과 더해져 꽃을 피울 동안 ‘박찬욱 스타일’이 영화 속에서 눈이 부시게 빛난다.
 
이렇게 한국에서 피어난 뱀파이어는 누군가의 내면에 쌓인 개인 감성의 서사를 정리하는 용도로, 영화 ‘박쥐’ 속에서 태양 아래 산화해버리며 쓰였다. 이 독창적인 사용법에 칸은 심사위원상을 주며 찬사를 보냈다.
 
시리즈 현혹 사진디즈니플러스
시리즈 '현혹' [사진=디즈니플러스]

영화 ‘박쥐’에 이어서 주목할만한 뱀파이어의 쓰임새는 올해 연말에 공개될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현혹’에서 확인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또 기대되는 뱀파이어 소재의 영화가 올해 하반기에 촬영이 시작될 예정인가 보다. 바로 고맙게도 한국형 오컬트에 최선을 다해 임해주는 장재현 감독의 ‘뱀피르’다.
 
‘현혹’은 한재림 감독에 홍경표 촬영감독이 합류해 제작되는 뱀파이어 시대극으로 400억 이상의 예산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토록 덩치가 큰 뱀파이어물이 한국에 또 있었나 싶다. ‘현혹’은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의 시대를 초월하는 로맨스를 애달프게 다룬 비교적 짧은 서사의 원작이 긴 시리즈에서 어떻게 담겼을지, 무엇보다 한재림이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어떻게 사용했을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한국형 오컬트에 집중한 장재현 감독의 뱀파이어 사용법 역시 극한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뱀파이어 헌터, 금기를 깨뜨린 성직자, 영생을 갈망하는 이교도인 등 등장인물의 면면만 봐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흥미롭기만 하다.
 
아름다운 뱀파이어의 향연도 좋지만 한국형 뱀파이어를 영리하게 사용함으로써 장르영화가 흥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멀미를 이겨내고 서서 봐도 좋을만큼 관객의 얼을 빼놓을 매혹적인 작품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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