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스님]
후덥지근한데다가 비까지 오락가락 하는 날인지라 길을 나서려니 머뭇거려진다. 이럴 때는 여러명의 힘을 빌려야만 비로소 갈 수 있다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치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종로권에 근거지를 둔 도반들에게 같이 가야하는 당위성을 설명해야 했다. 일단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 장소가 흥미로워야 한다. 그리고 답사 대상인물의 스토리텔링 즉 상품성이 있어야 한다. 온갖 감언이설로써 인정에 호소한 덕분에 3명으로 한 팀을 꾸리는데 성공했다. 차주인 J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시동을 걸었다. “망우리!”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동묘지 아니예요?”라는 반문에 “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었습니다.”라고 둘러댔다. 근현대의 많은 인물이 묻혀 있고 그 가운데 아홉어른 묘는 문화유산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라는 부연 설명을 했다. 스님들의 유별난 문화재 사랑을 부분적이나마 만족시켜야 했다.
망우리(忘憂里)는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 지명의 역사에는 왕과 대신 그리고 스님까지 등장한다. 태조 이성계는 인근 구리시 동구릉의 최고 명당에 자신의 능자리(뒷날 건원릉)를 정했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갯마루에서 쉬며 ‘걱정거리를 덜었다(忘憂)’며 매우 안도했다. 사실 그 터는 조선 개국공신 남재(南在 1351~1420. 3정승 역임. 호:귀정)가 이미 자기 묘자리로 봐둔 곳이였다. 하지만 왕의 속마음을 읽은 무학(1327~1405)대사가 넌지시 그 뜻을 공(公)에게 전달하여 양보를 받아냈다고 한다. 남재는 자기문집인《귀정유고(龜亭遺藁)》에 이런 저간의 사정을 (뺄건 빼고 넣을 것만 넣고서) 간단하게나마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어쨋거나 태조는 남재를 매우 아꼈다. 조선 개국 후 목은 이색(1328~1396)의 제자인 그를 등용하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했다. 은둔지에서 ‘별탈없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善其無恙尙在. 恙 병 양)’고 했다. 이를 계기로 본명인 겸(謙)을 재(在)로 바꾸었다고 하니 두 사람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 이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망우리를 찾아가는 목적은 근대조각의 선구자 권진규(權鎭圭1922~1973)선생의 묘소를 답사하기 위함이다. 공원 입구에서 권진규 조각가의 자소상(自塑像)을 만났다.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을 흔히 자화상이라 한다. 조각가로써 거기에 상응하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자소상이 되겠다. 2022년 탄생 일백주년 기념으로 기존의 테라코타(흙으로 만든 작품)를 청동상으로 복제하여 설치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안내소 벽에는 이 곳에 연고가 있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인 수십명의 이름을 동판으로 새겨 부착해 두었다.
권진규 선생은 1947년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조성작업에 6개월동안 보조자로 참여한 이력이 조각과 인연의 시작이었다. 참고로 미륵불상은 1936년 김복진(1901~1940) 선생이 착공한 이래 4년만에 사망으로 인하여 미완성 상태였다. 그 뒤를 이어 작업을 하던 윤호중(1917~1967) 선생을 곁에서 도운 인물이 권진규였다. 이후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 1963년 완성되었다. 착공에서 완공까지 예산 부족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단과 시작을 반복하면서 결국 완공까지 30년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이내 노후화로 인하여 시멘트 불상은 1986년 해체 후 1990년 33m의 청동대불로 거듭 조성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홍보용 게시판에 크게 그려진 둘렛길을 살펴보니 선생의 묘지번호는 57번이다. 지도를 잘 읽는 공간감각이 뛰어난 S가 앞장서서 큰 길을 따라 올라갔다. 가만이 있어도 땀이 나는데 언덕길을 오르려니 온몸이 격렬하게 반응한다. 드디어 ‘권진규 묘소 250m’라고 부기해 놓은 표지판이 나타났다. 그것만 봐도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이제부터 산길이다. 산길 250m는 평지길 250m와 확연히 다르다. 있는 힘을 다해 한참을 올라가다가 헉헉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나니 이내 내리막이다. 드디어 무덤 4기가 나란히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본인이다. 원래 봉분형태였다고 하나 지금은 평평하게 바뀌었고 묘비만 그대로 남겼다.
권진규 선생이 1973년 망우리 마지막 안장자라고 했다. 1933년 경성묘지 70만평을 조성한 이래 1973년 매장을 종료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도시를 개발하면서 노고산(서강대 뒷산)과 이태원 지역에 잠들어있던 망자들을 망우리로 옮겼다. 그 때 연고자가 없는 유골은 모아서 합장(合葬)을 했다고 한다. 비문에는 ‘큰 건물에서 함께 살고 큰 우산을 함께 쓰며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잔다’라는 미사여구로써 영혼들을 위로했다.
1990년 이후 공원조성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름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장의 역사는 진행 중이다. 도시팽창으로 인하여 그 때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누구는 이런 현상을 누구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공원화로 인하여 문화유산급 묘지를 제외하고는 장기적으로 모두 옮겨가야 한다고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모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묘비까지 허투루 대하지 않고 꼼꼼하게 자료를 모았다. 한국의 근현대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 결과물인 ‘망우리 비명록’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서문을 남겼다. 후속작업인 ‘망우인문학총서’까지 준비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낙이망우(樂而忘憂)라고 했다. 즐기면서 근심을 잊어야 한다는 말이다. 답사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습도 높은 날씨의 불쾌감을 이겨내기에는 우리들의 수행력이 아직도 역부족임을 절감한 일정이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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