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당국과 일부 정치권의 논리는 간명하다. 산술의 세계다. 1970년대 1000만 명에 달하던 초·중·고 학생 수는 이제 500만 명 선이 무너졌다. 머릿수가 반 토막 났으니 밥그릇 크기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맞춰 내국세 연동제를 폐지하고, 남는 재원을 국가 전략산업이나 다른 부문에 돌리자는 주장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린다. 경제의 언어로만 보면 반박하기 어려운 계산서다.
그러나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산술은 힘을 잃는다. 아이들의 머릿수는 줄었지만, 아이 한 명에게 들어가는 공적 비용의 밀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과거의 학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었다. 교사는 칠판에 판서를 하고, 돌봄과 양육은 온전히 가정의 몫이었다. 지금의 학교는 다르다.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8시까지 아이를 맡아주는 ‘늘봄학교’가 가동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합치는 유보통합의 거대한 짐도 교육청으로 넘어오고 있다. 정서·행동 위기학생을 위한 상담과 치료, 다문화 학생의 언어 교육, 특수교육 대상자를 위한 지원 인력 배치도 모두 학교의 책무가 됐다. 올해부터는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기초학력 미달부터 빈곤, 아동학대, 심리적 위기까지 학교가 컨트롤타워가 되어 관리해야 한다.
문제는 청구서다. 중앙정부는 저출산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교육복지 정책을 쏟아내면서, 그 비용은 대부분 시·도교육청의 교부금에 떠넘겼다. 국고보조금은 생색내기에 그치고, 인건비와 운영비라는 막대한 고정비용은 교육청이 교부금으로 메우는 구조다. 지난 2년간 세수 결손으로 교부금이 10조 원 이상 줄어들자, 일선 교육청들은 모아둔 기금을 헐어 돌봄과 복지 예산을 막기에 급급했다. 학교에 복지의 짐은 잔뜩 지워놓고, 학생 수가 줄었으니 지갑을 줄이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처사다.
물론 교육청의 방만한 살림살이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학생 수가 줄어든 자리에 남은 낡은 행정 조직을 수술하고, 선심성 현금 지원 사업을 걷어내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마땅히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다. ‘학령인구 감소=교부금 삭감’이라는 단순 경제 논리로 곳간부터 걸어 잠그면, 가장 먼저 찢어지는 것은 교실 안의 촘촘한 복지 그물망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취약계층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공교육의 돌봄과 상담이 후퇴한 자리에서 돈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사교육 시장의 돌봄으로 이동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방치된다. 교육재정의 축소가 곧 복지 사각지대의 확대로 이어지는 셈이다.
9년간 교육 현장을 취재하며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교실 안의 문제는 결코 교실 안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정의 빈곤과 돌봄의 공백이 교실의 위기로 번지고, 교실에서의 실패가 다시 사회적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이제 교육을 입시와 학력의 프레임으로만 재단하던 시대는 끝났다. 교육과 복지를 하나의 생애주기 안전망으로 묶어내는 ‘에듀웰(Edu-Wel)’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다.
교부금 개편 논의는 돈줄을 죄는 영수증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아이 한 명을 온전히 키워내기 위해 교육과 복지의 역할을 어떻게 나누고, 그 비용을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교육부와 지자체가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를 다시 쓰는 일이어야 한다. 아이는 줄었지만, 남아 있는 아이들의 삶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삶을 지탱하는 비용마저 효율성이라는 칼날로 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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