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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시리즈 15] 호암 이병철과 마쓰시타 고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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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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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을 키워낸 호암 이병철(1910~1987)과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는 여러 차원에서 닮은 점이 많다.

기업을 세우고 경영하는 철학이나 종업원들을 이끄는 조직관리 방식, 경영 스타일은 마치 두 영웅이 서로 여러 차례 만나 상의한 듯 유사하다는 평가다.

16세 차이인 호암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생전에 만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호암은 마쓰시타와 함께 일하다 독립해 산요전기를 창업했던 처남 이우에 도시노 회장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969년 함께 삼성산요전기(1977년 삼성전자로 합병)를 창업하기도 했다.

호암과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신유교주의적 가치관을 기업 경영에 접목시켰고, 유사한 영역에서 서구 기업들을 제치거나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글로벌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50년대까지 유교 문화는 경제 발전의 저해 요소로 여겨졌다. 노동을 기피하고 상인을 천대하는 유교문화가 근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서양의 경우 근검 절약정신(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를 발달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무제한적인 자유경쟁, 개인주의가 기업 조직의 발전에 저해 요소가 돼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신유교주의는 경쟁보다는 구성원간의 조화, 개개인의 수양과 기강, 조직체의 화합과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호암과 마쓰시타가 신유교주의 학문을 접한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익힌 논어(論語) 등의 가르침을 체득해 그 장점을 기업경영에 접목했던 것이다.

두 영웅의 첫 출발은 판이하게 달랐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호암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부친으로부터 받은 쌀 300석 분의 재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남의 가게 점원 생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주 집안의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마쓰시타는 부친이 쌀 장사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돈을 벌기 위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오사카로 나갔다가 지나가는 전차를 보고 ‘앞으로 전기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 전기회사에 입사해 전자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쓰시타는 23세에 독립해 3명으로 회사를 창업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갖고 전기제품을 팔아보려고 했지만 열악한 자금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그의 초년 고생에 마침표를 찍게 해준 것은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전구를 한꺼번에 두 개씩 끼울 수 있는 쌍소케트와 자전거의 전지라이트가 크게 히트하면서 20대 후반에 청년실업가로 떠오른 것이다.

1920년대말 세계 공황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나빠져 판매가 줄어들자 각 기업마다 인력 감축에 나섰다. 그러나 마쓰시타는 인력을 감축하지 않는 대신 사업부제를 도입하고 주2일 휴무제를 실시했다.

또한 종업원들에게 경영실태를 투명하게 공개해 ‘유리창 경영자’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마쓰시타전기는 71개 관계회사에 종업원 14만명, 연매출 5조600억엔 규모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으며 ‘내셔널’ ‘파나소닉’ ‘마쓰시타’는 세계적인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호암과 마쓰시타는 사업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업을 일으켜 국부를 창출한다는 굳건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호암은 26세 때 마산에서 정미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사업보국(事業報國) 철학을 갖고 출발했다. 이후 무역, 제당, 제지, 금융, 전자 등 각 사업영역에 진출할 때마다 ‘이 사업이 국민들을 위해, 나라 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인지’ 여러 차례 자신에게 반문해 본 후 확신이 서면 결단을 내렸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낸 마쓰시타는 ‘경영이란 세상에서 가난을 없애는 성스러운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46년 ‘번영으로 평화와 행복을’이라는 의미의 영문자를 딴 PHP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기업의 역할과 국가 번영을 위한 정책적 과제 등을 설파하기도 했다.

두 영웅의 가장 큰 경영철학은 ‘인재경영’이었다.

서구식 기업 경영에서도 사람은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서구의 경영인들이 ‘기능적’인 면을 존중해왔다면,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호암은 인격을 중시하는 가운데 기능과 발전성을 중시하는 차원의 경영을 추구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누군가 우리 회사를 찾아와 ‘당신네 회사는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고 물으면 ‘사람을 만들고 있다’고 대답하라”고 말하곤 했다.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 회사의 사명이기는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제품에 앞서 사람을 만들어야 하고, 좋은 사람이 배출돼야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였다.

호암의 인재경영은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해방 직후 호암은 서울에 삼성물산 공사를 차린 이후 대구의 삼성상회와 양조장을 김재소 사장 등에게 맡겼다. 그들은 6․25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에서 무일푼이 돼 대구로 피난 온 호암에게 그동안의 이익금 3억원을 건네줬다. 이 일이 없었더라면 호암은 재기할 수 없었고, 그는 인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삼성은 1958년부터 공채를 통해 사원을 뽑았다. 바로 그들이 오늘날의 삼성을 만드는데 공헌한 인물들이다. ‘한번 뽑은 사람은 믿고 맡긴다’는 이병철의 인재관에 따라 길러진 전문경영인들이 삼성그룹 발전의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fresh@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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