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완료' 광화문, 4년 전과 달라전 점은?

(아주경제 인터넷뉴스팀 기자) 15일 공개된 광화문은 고종 중건 당시인 1865년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된 것이다. 2006년 이번 복원작업에 들어가기 전의 '1968년 복원판'과 대체로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기존 광화문이 콘크리트였던 데 반해 이번에는 목조로 복원됐다는 점이다. 도성(都城)의 정문이었던 숭례문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서의 의미가 살아난 것이다.

복원된 광화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광화문의 새 현판이다. 1968년 콘크리트 복원 당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을 기초로 만들어 걸었던 광화문 현판이 이번에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1900년대 초의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해 제작한 광화문의 새 현판은 고종 때 공사책임자였던 훈령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의 글씨다. 각자장(刻字匠. 중요무형문화재 106호) 오옥진 선생이 글씨를 새겼고 단청 채색은 단청장(丹靑匠. 서울시무형문화재 31호) 양용호 선생이 맡았다.

 또 복원된 광화문은 기존 위치에서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각도도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 비틀어져 있던 것을 이번에 바로 잡았다.

이로써 광화문은 근정전-근정문-흥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ㆍ문과 정확히 평행을 이루게 됐다. 광화문 광장 쪽에서 열린 광화문을 바라보면 문 사이로 흥례문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인다.

광화문의 서까래(椽木)는 1968년 복원 때 일제 당시 잘못된 실측 자료를 바탕으로 해 크기가 15㎝로 얇아 비례가 잘 맞지 않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번 복원에서는 이 역시 21㎝로 바로잡았다.

지붕과 처마를 떠받치는 서까래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문루(門樓)가 훨씬 더 안정감 있고 튼튼해보이게 됐고 보기에도 더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됐다.

광화문 홍예문을 지나면 문 뒤편에 중건 당시 부속 건물 5개 동도 복원된 것을 볼 수 있다. 좌우의 동ㆍ서수문장청, 용성문, 협생문, 영군직소 등이다.

이번 광화문과 주변 전각들의 복원으로 고종 당시 500여동에 이르던 경복궁 내 건물 가운데 125동의 복원이 끝났다. 동 수를 기준으로 하면 25%가량 완성된 셈이다. 광화문 뒤편의 건물 5개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20년간 진행할 2차 복원사업을 통해 고종 당시의 76% 수준까지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news@ajnews.co.kr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고궁걷기대회_기사뷰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