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98> 리샤오펑, 출세가도 달리는 리펑의 아들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리샤오펑(李小鵬) 산시(山西)성 상무부성장은 리펑(李鵬)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장남이다. 여동생인 리샤오린(李小琳)은 중국전력국제유한공사의 회장이다. 리샤오펑은 순조롭게 사회생활을 해왔고, 젊은 나이에 국유기업의 회장까지 올랐으며, 공직에 나선 이후에도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고 있다. 아버지인 리펑의 영향력이 후광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리펑은 아이가 없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다. 저우언라이의 후원에 힘입은 리펑은 1982년에는 공산당 중앙 위원, 1985년에는 정치국원, 1987년에는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1988년에는 국무원 총리에 등극했고 총리로 10년을 활동한 후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03년 우방궈(吳邦國)에게 전인대 상무위원장직을 넘기고 은퇴한다. 무려 16년을 상무위원으로 활동한 그였기에 은퇴 이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리샤오펑으로서는 든든한 후원자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959년 6월에 태어난 리샤오펑은 중국 국무원 전력부장을 역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화베이(華北)전력학원에서 전력계통과를 졸업했고 캐나다에서 유학했다. 이후 전력엔지니어 등을 거쳐 1991년 전력회사인 국가에너지부 산하의 화넝(華能)국제전력개발에 들어간 후 ‘아시아의 전력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1995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화넝(華能)그룹의 사장으로 승진했으며 2000년 뉴욕 증권시장에 상장됐던 산둥화넝(山東華能)을 인수했다. 이를 통해 2001년 화넝그룹의 회장에 올라섰다.

2001년 말 리샤오펑은 스캔들에 휘말린다. 당시 베이징의 주간지인 증권시장주간이 ‘신비한 화넝’이라는 기사를 게재한 것. 기사는 화넝궈지는 가족형 사업의 전형이며, ‘화넝’이라는 거대한 함선의 조타수는 리샤오펑이고 선장은 리펑의 부인인 주린(朱琳)이라고 적시했다. 이후 잡지는 몰수됐고 기자는 구속된다. 그리고 주린은 ‘중화영재’라는 잡지의 인터뷰요청에 응해 청렴함을 과시했다. 주린은 “오늘날까지 나는 주식 한 장 가져본 적이 없으며 불법채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다”고 해명했다.

이듬해인 2002년 중국 전력산업이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화넝집단은 국가전력공사의 대규모 우량자산을 승계했다. 화넝이 일약 아시아 최대의 전력공사로 뛰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화넝은 석탄, 철로, 항구 등의 사업을 영위하던 기업들을 인수합병했고 전력을 핵심으로 하는 거대 에너지기업이 됐다. 상하이, 홍콩, 미국에 상장되면서 국제적인 규모를 갖추게 된다.

대형 국유기업의 회장으로 근무하던 리샤오펑은 2008년 정치에 입문한다. 당시 대만의 연합보는”리펑이 2008년 중공 중앙에 자신의 아들인 리샤오펑을 중공 중앙의 아들로 여겨줄 것을 당부했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리펑의 역할이 작용했다는 설이 분분하지만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베이징의 정치 분석가들은 국유기업의 회장자리를 마다하고 부성장으로 옮겨갔다는 점을 들어 리샤오펑의 꿈이 작지 않다고 보고 있다.

리샤오펑은 2년후인 2010년 6월 산시성 상무부성장 겸 부서기로 올라섰다. 그는 2010년 공석이 된 후난(湖南)성 성장으로의 이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었지만 아직은 리펑의 아들인 리샤오펑을 성장직으로 중국정치의 전면에 내세우기에는 공산당으로서는 부담스러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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