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건축가 승효상이 전하는 '터무니' 있는 제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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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제주=기수정 문화팀 팀장
입력 2022-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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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 증언하는 땅이 가진 무늬 '터무니'

  •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 '알뜨르 비행장'

  • 텅 빈 공간에 둥그런 창 하나 '추사관'

  • 황무지 개간 목장에 '미스터 밀크' 공장

  • 수직과 수평의 조화 '롯데리조트 제주'

"일본인 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탐라기행>을 읽고 제주에 대한 이중적인 생각을 고치게 됐다. 제주의 풍광이 이국적이라고, 그래서 흔히 신혼 여행지로 혹은 간혹 가서 놀다 오는 곳으로 막연히 동의해 왔던 잘못된 생각을 직시하게 됐다" -저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중에서-

 

알뜨르 비행장에 대해 설명하는 건축가 승효상. [사진=기수정 기자]

오랜만에 제주를 찾은 현대 건축의 거장 승효상(이로재 대표)과 만나 제주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숱하게 다녔던 제주여행이었음에도 제주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아서였을까.
그동안 생각해온 제주는 '천혜의 자연'을 품은 아름다운 섬, 사계절 여행하기 좋은 곳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승효상과의 만남은 큰 울림을 안겼다. 비로소 깨달았다. 제주 하면 자연스레 떠올랐던 느낌이, 사실은 얕은 감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뜨르 비행장. 산방산과 20여 기 격납고가 이색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사진=기수정 기자]

◆피와 눈물의 역사를 마주하다 

제주가 품은 이국적인 문화와 온화한 기후, 다양한 볼거리·즐길 거리는 뭍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절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제주는 그렇게 우리나라 제1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제주의 이국적인 풍광 뒤에는 깊게 스며든 피와 눈물의 역사가 가려져 있다. 승효상 작가가 알뜨르 비행장을 제1 목적지로 삼은 것도 제주가 품은 아픈 역사를 잊어서도, 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으리라.

"제주는 바다 건너가는 고을이란 뜻입니다. 철저히 육지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죠." 바다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고립의 섬이 바로 제주다.

승효상은 "제주는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는 땅"이라고 이야기했다. 제주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이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제주 땅에 스며들어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민감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일본군이 제주를 침략 전쟁의 교두보로 활용했다. 그렇게 제주는 전투기의 중간 보급소가 됐다. 알뜨르 비행장이 자리한 대정 지역은 특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강제노역과 각종 수탈,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희생을 강요받았다.

일제가 제주 주민 5000명을 매일 동원해 만들었다는 크고 작은 격납고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알뜨르 비행장에 그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고, 한국전쟁 직후 무고하게 처형당한 제주 주민 132명 유골을 한데 수습한 공동묘지 '백할아버지한무덤' 등도 남아 우리 선조가 그들의 과욕에 의해 얼마나 무참히 짓밟혔는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다. 
 

추사관 건축 배경에 대해 회고하는 승효상 작가. [사진=기수정 기자]

◆빈자의 미학을 실현한 공간에 서다 

"많은 여행객이 알뜨르 비행장의 신기한 모습을 배경 삼아 연신 사진만 찍고 떠나죠. 일제강점기와 4·3사건 등 아픈 역사를 외면한 채 말이죠. 이 넓은 들판에 방치된 거대한 격납고 시설들, 그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산방산과 푸른 바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이 땅에 깊이 박힌 속살과 자연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거장의 멋진 미술작품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승효상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두 번째 목적지인 추사관으로 향했다.  추사관은 제주에서 8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를 기리며 만든 미술관으로, 승효상이 설계를 맡았다.

1984년 유물전시관으로 시작해 2007년 김정희 유배지가 사적으로 승격하면서 새로운 건물이 필요해졌고, 승효상에게 건축 의뢰가 들어갔다.

승효상은 "추사관 건축 의뢰가 들어왔는데, 규모가 500평 넘었다.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은 작은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500평 규모 건물을 지어 달라고 하니 퍽 고민이 됐다"고 회고했다. 

고민을 끝낸 승효상은 모든 전시 시설을 지하로 보내고 땅 위에는 '집 형태'만 남기기로 했고, 그의 기획 의도에 맞게 건물이 완성됐다. 

건물을 본 주민들은 "웬 감자창고 하나가 들어섰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승효상은 "추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이렇게 불리는 것은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추사의 성품처럼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게 지어졌다. 텅 빈 공간에 둥근 창 하나만을 냈다. 창밖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세한도'를 완성한 듯 보이는 풍광에 "기획 의도였는지"를 물었지만 승효상은 "전혀 아니다"고 못 박았다. 

전시관에서는 다양한 전시품을 통해 추사의 굴곡진 삶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최고의 볼거리는 그의 글씨다. 위엄 있는 서체 속에는 그의 학문뿐 아니라 개인의 삶이 녹아 있다. 또 일본의 추사 연구가인 후지쓰카 지카시가 영인한 세한도 한 점과 유배 시절 추사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지인들에게 쓴 편지도 감상할 수 있다.

추사의 작품과 탁본 등을 둘러보고 위층 추모 공간인 추사홀로 향했다. 빈 공간에 임옥상 화백이 만든 추사의 흉상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극단적으로 절제된 공간이 퍽 강렬했다.

추사관을 나오기 전, ​동그란 창문 아래 걸린 '판전(板殿)' 액자를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훌륭한 문체를 남겨온 추사는 말년에 본인이 처음 쓴 글씨체로 돌아갔어요.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여행을 끝내고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 거죠." 

전시관 옆에는 추사가 기거하던 집과 유배생활 모습을 복원한 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가 있었다. 한 평 남짓한 비좁은 모거리(별채)에 머물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리라. 
 

승효상 작가가 성이시돌목장 측 의뢰를 받아 설계한 미스터 밀크. [사진=기수정 기자]


◆백파진 프로젝트를 완성하다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는 승효상이 가장 최근 제주에 설계한 '미스터밀크' 공장이었다. 성이시돌목장에서 생산하는 우유를 받아 치즈 등 유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바로 미스터 밀크다.

성이시돌목장은 1954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였던 맥그린치(P. J. Mcglinchey) 신부가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곳이다. 아일랜드 출신인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도민을 돕기 위해 목장을 짓고 우유와 육류를 생산했다.

군용 막사처럼 생긴 테시폰(Cteshphon)은 이란 바그다드 근처 지역에서 처음 시작한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곳 건축물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건축 관련 서적에도 소개될 정도다. 

성이시돌목장과 이를 둘러싼 배경이 퍽 이국적이어서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이가 찾는다. 

승효상은 성이시돌 목장 측 의뢰를 받아 공장을 설계했다. 승효상이 건축한 미스터밀크 공장은 목장 밖에 있다. 승효상은 "성이시돌목장 처음으로 외부 업체와 협업해 짓는 것인 만큼 작업이 의미 있었다"고 전했다. 

승효상은 프로젝트명을 '백파진'으로 정했다. 

승효상이 건축 프로젝트명을 '백파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백파가 '하얀 언덕'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금오름을 배경으로 하얀 파도를 내려다보는 성채다. 건물 역시 이름처럼 새하얀 색을 띤다. 

공장은 오는 6월 말께부터 운영될 예정이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요거트와 아이스크림, 치즈 등 제작 과정을 관람하고, 유제품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건축기행을 마치며 그가 '건축'에 대해 정의했다. 

"건축은 시대를 증언하고 장소를 증언합니다. 건축화 작업이 중요한 이유이지요. 땅이 가진 무늬, 그것을 터무니라고 해요. 우리 시대의 무늬를 붙여서 새로운 터무니를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우리 임무입니다. 터무니 있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거죠. 터무니없는 이상한 건물을 지어서 사람을 환각 상태에 빠뜨리는 건 나쁜 건축입니다. 땅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해야 좋은 건축물이 완성됩니다."
 

롯데리조트 아트빌라스 전경. 10년 전 승효상을 비롯해 도미니크 페로, 겐고 구마 등 세계적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했다. [사진=기수정 기자]

◆수직과 수평의 조화를 찾다 

승효상이 설계에 참여한 제주 건축물 중 롯데리조트제주 아트빌라스도 있다. 고급 숙박시설인 아트빌라스는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도미니크 페로, 겐고 구마 등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건축 거장 5인이 빌라 설계에 참여했다. 당시 승효상 작가는 아트빌라스 총괄 기획자로 활약했다. 건축가들이 자신만의 건축 세계관을 담아 각양각색의 빌라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이 모든 것이 제주의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승효상이 설계한 숙소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롯데리조트는 투숙객들을 대상으로 매주 일요일 5시간 원데이 프로그램 '승효상 기획 건축투어'를 운영 중이다. 해당 프로그램은 승효상의 제자인 건축가 양현준이 도슨트를 맡아 진행한다.

아트빌라스 단지 내 건축물에 대한 설명 후 밖으로 나가 본격적인 건축기행을 시작한다.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인 추사관을 시작으로 알뜨르 비행장을 거쳐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 있는 본태박물관에서 마무리된다.  

리조트에서는 제주 방언과 식재료에 대한 설명을 듣고 토속음식을 만들어볼 수 있는 쿠킹클래스를 비롯해 골프장 카트 투어, 와인 클래스 등 투숙객 대상 체험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한다.
 

추사관 전경. 승효상은 모든 전시 시설을 지하로 보내고 땅 위에는 '집 형태'만 남겼다. [사진=기수정 기자]

동그란 창문 아래 걸린 '판전(板殿)' 액자. [사진=기수정 기자]

빈 공간에 임옥상 화백이 만든 추사의 흉상만을 놓아 절제미를 극대화했다. [사진=기수정 기자]

미스터 밀크 공장. 승효상은 이를 백파진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다. [사진=기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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