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창업혁신·디지털경제 이끈 개혁·실용주의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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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배인선 특파원
입력 2023-10-2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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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커창 前 총리 27일 심장병 사망

  • 리코노믹스·커창지수 선보인 경제학 박사

  • 한때 시진핑의 라이벌···'쓴소리' 내놓아

  • 베이징대 '수재'에서 '비운의 총리'로

  • 시안 삼성공장 방문···한국과 인연도

2022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후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리커창 전 총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2022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후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리커창 전 총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지난 27일 사망한 리커창 전 중국 국무원 총리(68)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집권 1·2기였던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4억 인구의 중국 경제 조타수 역할을 맡았다. 온건한 개혁파·실용주의 성향으로 한때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로도 주목받았지만 시진핑 주석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에 밀려 총리 임기 후반부로 갈수록 존재감을 잃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리코노믹스·커창지수 선보인 中 최초 경제학 박사 총리
2013년 출범한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의 5세대 지도부는 '시·리 조합(習李組合·시진핑과 리커창 체제)'이라 불렸다. 중국에서 총리는 국무원 수반으로 국가주석과 함께 '쌍두마차'를 이끄는 한 축이다. 정치·외교는 국가주석이, 총리는 경제 분야 주도권을 쥐고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중국 최초 경제학 박사 출신 총리인 리커창은 역대 최고 총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리커창은 취임 후 경제 구조조정 개혁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른바 '리코노믹스(리커창 경제정책)'다. 정부 주도 경제성장 모델은 한계에 달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리코노믹스의 핵심은 인위적 경기 부양 지양, 부채 감축, 구조 개혁으로 요약된다. 특히 그는 "손목을 잘리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는 경제 구조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커창이 실물경제 흐름을 파악할 때 국내총생산(GDP) 대신 참고한 전력생산량, 철도 화물운송량, 은행 대출이라는 3대 지표는 '커창지수'라 불리며 중국 경제 흐름을 짚는 새로운 지표가 됐다.  

시장과 기업의 역할을 중요시했던 그는 중국 경제성장 해법으로 '대중 창업, 만인 혁신'과 '인터넷플러스 정책', 국유기업 개혁, 자유무역시험구 창설 등도 적극 밀어붙였다.  
 
한때 시진핑의 라이벌···'쓴소리' 내놓기도
하지만 중국 경제성장률 둔화와 증시 붕괴 등 악재가 연이어 터지면서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경제뿐 아니라 군사, 외교에 이르기까지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수십 개 위원회와 영도소조가 생겨나 권력이 시 주석에게 집중되면서 리커창은 존재감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그의 소신 있는 발언은 외신에 종종 보도됐다. 시 주석이 빈곤퇴치 사업 성공을 대대적으로 과시하던 2020년 "중국 국민 6억명 이상이 한 달에 1000위안에 못 미치는 소득을 벌고 있다"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지난해 제로 코로나 방역으로 중국 개혁·개방 기조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올 때는 ‘개혁·개방 설계사’ 덩샤오핑 동상 앞에 헌화하면서 “창장과 황허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長江黃河水不會倒流)”는 뼈 있는 말로 개혁·개방 의지를 다졌다. 

올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국회 격) 정부공작보고를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그는 국무원 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做 天在看)"란 말을 건넸다. 겉으론 인민을 위해 성실히 복무할 것을 당부한 이 말이 사실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중국 최고 지도부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해석도 나왔다.  

퇴임 후 중국 관영매체에서는 '리커창 지우기'가 시작됐다. 퇴임 후 5개월 만인 지난 8월 리 전 총리가 간쑤성 둔황 모가오굴을 방문한 모습이 해외 소셜미디어에 올라왔지만 중국 국내에서 리 총리 은퇴 후 행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베이징대 '수재'에서 '비운의 총리'로
리커창 전 총리는 1955년 7월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빼어난 학업 성적을 자랑했던 그는 수재로 이름을 알렸다. 문화대혁명(문혁)이라는 대혼란 와중인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농촌으로 하방됐다. 문혁이 끝나고 1977년 대입 시험이 재개됐을 때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베이징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베이징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서기로 진로를 택하면서 현실 정치에 발을 들였다. 1993년에는 38세 나이로 공청단 최고위직인 중앙서기처 1서기(장관급)로 승진했다. 공청단 출신으로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후진타오가 리커창의 박식함에 매료돼 그의 승진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후진타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리커창은 1998년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허난성으로 자리를 옮겨 성장, 서기에 오르며 지방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후 랴오닝성 서기로도 근무한 그는 동북진흥계획 사업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 승진가도를 달렸다.

그 당시만 해도 리커창은 같은 공청단 출신인 후진타오 전 주석이 점찍은 차기 국가주석 1순위 후계자였다. 중화권 언론들은 그가 허난성과 랴오닝성 당서기로 재직할 때 공공연하게 ‘내일의 태양’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반면 당시만 해도 시진핑(習近平) 당시 저장(浙江)성 서기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하지만 2007년 10월 제17차 당대회에서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리커창은 권력서열 7위(부총리)로, 서열 6위(국가부주석) 시진핑에 한 발 밀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입성했다. 이를 놓고 당시 후진타오·리커창을 중심으로 한 공청단파의 급부상을 견제하던 정치 원로세력인 '태자당'이 장쩌민 전 주석계의 '상하이방'과 손잡고 시진핑에게 적극 힘을 실어준 결과라는 해석도 나왔다. 시진핑 주석 부친은 과거 부총리까지 지낸 혁명원로 시중쉰이다.
 
네 차례 방한, 시안 삼성공장 방문···한국과 인연도
2015년 방한한 리커창 전 총리 사진연합뉴스
2015년 방한한 리커창 전 총리. [사진=연합뉴스]

리커창 전 총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생전 한국을 네 차례 방문했다.

첫 번째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때인 1995년이다. 이어 랴오닝성 당 서기 시절인 2005년 9월에도 방한해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 등 정부 인사와 삼성, 현대, LG, 포스코 등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2011년 10월 부총리 시절에는 남한과 북한을 잇달아 방문해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마지막 방한은 총리로 재직할 당시인 2015년 10월 한·중·일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서였다. 그는 방한 기간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만나 북핵과 한반도 통일 문제 등에서 양국 간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리 전 총리는 2019년 10월엔 중국 시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직접 찾아 외국인 투자 환영 의지도 적극 내비친 바 있다. 그는 "중국 대외 개방의 문은 커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는 삼성을 포함한 각국 하이테크 기업들이 계속 중국에 투자를 확대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서울과 베이징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개최한 포럼에서 "양국은 이사할 수 없는 이웃으로, 선린 우호를 지키고 핵심 이익을 지키며 양자 관계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며 한·중 관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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