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의 주요 정당 지도자가 유럽 내에서 자체적인 핵 억제력을 갖추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와의 협력을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위한 협상에 착수하면서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고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비난하는 행보를 보이자, 유럽이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
21일(현지시간)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 등에 따르면 중도 우파 기독민주당(CDU)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는 독일 ZDF방송과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더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집단 방위 약속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나토를 통한 미국의 핵 보호 없이도 유럽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독일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와 함께 나토의 핵 공유 정책에 따라 미국 핵무기를 수용하고 있다.
메르츠 대표는 "유럽의 두 핵 강국인 영국, 프랑스와 핵을 공유하거나 최소한 두 나라의 핵 방위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며 "트럼프 체제에서는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차기 독일 총리로 유력하게 점쳐지는 그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독일의 중대한 전략적 변화를 예고한다고 폴리티코는 짚었다. 전통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온 CDU는 핵 방어 계획을 오랫동안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2007년 핵무기 공유 방안을 모색하는 대화를 시작하자는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영국의 EU 탈퇴 후 EU 내 유일 핵보유국인 프랑스는 메르츠 대표 발언에 반색했다. 프랑스 하원 국방위원회 소속 장 루이 티에리외 의원은 "메르츠가 미국과의 탈동조화, 즉 미국 핵우산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과거와는 큰 변화"라고 했다. 엘리제궁 관계자도 “프랑스가 2020년 제안한 유럽 핵 방위 논의에 대한 응답”이라며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유럽의 독자적인 핵 방어 체계 구축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영국은 기존 나토 체제 하에서 유럽 동맹국들에게 핵 우산을 제공하고 있지만, 미사일 프로그램은 미국과 깊이 연계돼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는 나토 회원국이지만 영국과 달리 나토에 핵무기 접근 권한을 허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핵 방어 체계를 유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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