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46) 담장 위의 풀 - 장두초(牆頭草)

유재혁 칼럼니스트
[유재혁 칼럼니스트]
 
수년 전 지인들과 취미활동을 함께 하던 동호회에 소소한 갈등이 불거졌다. 당사자들이 만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면 쉽게 해소될 문제였는데 단톡방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보다 못해 양쪽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며 조속한 화해를 촉구했다. 그러자 한쪽 당사자로부터 이런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양비론은 기회주의자의 특징이다." 

양자택일의 진영논리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에서 양비론을 펼치다가 기회주의라고 공격을 받는 일은 흔한 일이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든다는 힐난이다. 어느쪽으로부터도 욕을 먹지 않으려는 '보신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국어사전은 '기회주의(機會主義)'를 이렇게 풀이한다. "일관된 입장을 지니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경향. 특히 당시의 상황에 가장 유리한 편이나 세력에 기대어 행동하는 입장." 그러니까 '기회주의적' 처신의 판단 기준은 '입장의 일관성'과 '상황의 유불리 계산' 여부라는 얘기다. 

그런데 친목 동호회에서 일어난 작은 갈등이 다른 회원들의 개인적 이해득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해관계가 특별할 게 없으니 입장을 바꾸고 말고 할 것도 없고 개인적 유불리를 따질 이유도 없다. 그저 모두가 불편해 하는 상황, 어느 쪽이 이겨도 동호회에 상처일 수밖에 없는 불필요한 갈등이 조기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총대를 메고 나섰을 뿐이다. 애당초 기회주의와 연결시키는 게 무리였다는 얘기다. 양비론이 늘 부정적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다. 당사자들의 감정적 대립을 완화함으로써 갈등의 해결책으로 기능하기도 하니까. 아쉽게도 모든 회원들이 바라던 그런 해피엔딩은 오지 않았다. 

'기회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역대 어느 정부도 첫 조각이 순탄치 않았고 이는 새로 출범하는 이재명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애써 사람을 찾아도 이런저런 흠결이 드러나고 의혹이 제기되어 곤욕을 치르기 일쑤다. 오광수 민정수석이 부동산 차명 보유와 차명 대출 의혹으로 취임 닷새 만에 낙마했고, 이종석 국정원장에 대한 친북 성향은 개운하게 소명되지 않았다. 김민석 총리 후보자는 재산 형성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관련 의혹이 불거지면서 사생활이 탈탈 털리고 '제2의 조국'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털면 예외 없이 먼지가 나오니 야당은 공격에 신바람을 내고 여당은 묻지마 총력방어에 나선다. 대한민국 정치판의 변하지 않는 모습, 불변의 법칙이다. 혹시나 하고 지켜보던 국민은 "역시나! 죄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며 체념 모드에 빠져든다. 강고한 이 불변의 법칙을 깨고 여야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이 있으니 바로 송미령 장관이다. 송 장관은 윤석열 정부 각료로서 유일하게 유임됐다. 전 정권 장관의 유임이라니. 정권이 바뀌면 사람이든 정책이든 모든 걸 갈아엎기 일쑤인 척박한 정치 풍토에서 워낙 드문 일이다 보니 일견 신선해 보인다. 그런데 야당은 물론 여당으로부터도 덕담은커녕 날 선 반응이 주를 이룬다. 이유가 뭘까?

송미령 장관은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시절 추진한 양곡관리법 등 농업 4법을 '농망(農亡)법'이라고 비판하며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법이라는 소신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장관직에서 유임이 되자 태도가 급변했다. 이재명 정부 국정철학에 맞춰서 그동안 쟁점이 됐던 법안이나 정책에 대해 전향적으로 재검토하겠다며 농망법이라고 표현한 것을 사과했다. 거친 표현이야 얼마든지 사과할 수 있다. 송 장관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갔다. "농망의 망(亡)을 희망의 망(望)으로 바꿀 수 있게 하겠다"며 "법이 잘 통과되게끔 분골쇄신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소신을 버리고 입장을 바꾸겠다는 얘기다. 표변(豹變)도 이런 표변이 없다. 영락없이 장관직 유임이라는 개인적 이득과 농망법 소신을 맞바꾼 모양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어제까지 한식구였던 야권에서는 물론 여권에서도 송 장관을 향해 비판의 화살이 쏟아졌다. 자리를 탐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이라는 거다. 전 정권에서 일했다고 해서 후임 정권에서 일을 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능력이 있으면 계속 일을 하게 하는 게 나라에도 이롭다. 송 장관이 구설에 오른 건 능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소신을 바꾸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농망(亡)법'이라던 소신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농망(望)법'으로 바뀔 수 있는지. 정부가 바뀌었다고 법이 알아서 셀프 둔갑이라도 했단 말인가. 장관이나 되는 인사가 개그쇼에서 말장난 하듯 새털처럼 가볍게 소신을 바꾼다.

담장 위에서 자라는 풀이 있다. 중국에서는 '장두초(牆頭草)’라고 한다. 담장은 안쪽과 바깥쪽을 가르는 경계다. 담장 위에 있는 장두초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이쪽 저쪽으로 쉽게 흔들린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장두초는 송대(宋代) 이후 세력이나 분위기에 따라 이리저리 소신과 입장을 바꾸는 사람, 약삭빠른 기회주의자를 비유하는 관용어로 자리잡았다. 장두초 뒤에 '수풍도(隨風倒)'를 붙여 속담처럼 쓰기도 한다. '장두초 수풍도'는 '담장 위의 풀은 바람 부는 쪽으로 쓰러진다'는 뜻으로, 우리 속담 중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정권이 바뀌면 말을 바꾸고 유력자에게 기대는 사람들이 늘 있기 마련이다. '담장 위의 풀’ 같은 사람들이다. 송미령 장관의 처신이 그렇다. 바람을 읽고 몸을 트는 데 능하지만, 소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옛날 백이와 숙제처럼 정권교체를 불의로 여기고 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굶어 죽는 걸 칭송하는 시대는 아니다. 관중은 자신의 주군을 죽인 제환공이 포용정책을 펴자 이를 받아들여 재상으로 일하며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제나라를 춘추시대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계속 일할 기회를 얻었으니 새 국정철학에 맞추겠다는 송 장관의 처신을 관중식 유연함으로 볼 수도 있다. 타인의 행동을 명쾌하게 재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부정하고 기존의 입장을 바꿔야 할 정도라면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깨끗이 물러나는 게 보편적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공직자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궁금하긴 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왜 송미령 장관을 콕 찝어서 유임을 시켰는지. 대통령실 발표대로 성과와 실력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에 입각한 탕평인사일까, 야권인사들이 의심하듯 통합을 빙자한 갈라치기일까. 계엄 관련 검찰 수사에 가장 협조적이었다느니 국무회의 때 보니 현안 파악이 가장 잘 되어 있다느니 하는 여권발 통신은 대외 발표용 냄새가 짙다. 강경 지지자들과 농민단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대통령으로서 양곡법에 대한 생각이 야당 대표 때와 같을 수도 없으니 송 장관을 앞세워 부담스러운 숙제를 처리하겠다는 게 유임인사의 진정한 속내라는 게 중론이다. 전 정부 인사를 중용한다는 탕평과 능력을 우선하는 실용의 이미지도 덤으로 따라오니 말 그대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가성비 좋은 용인술이다.

딱한 건 송미령 장관이다. 자신의 입장을 적극 방어하고 각종 현장을 찾는 등 나름 의욕을 보이지만 사방에서 들리는 거라곤 온통 비난과 퇴진 요구뿐이다. 농업 4법이 어떻게 처리되든 결과에 상관없이 어느 한쪽으로부터는 욕을 먹기 십상이다. 임명직 공무원은 아무 때나 바꿀 수 있다고 공언하는 대통령이니 언제든 토사구팽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 대통령이 '밑져야 본전'이라면 송 장관이 선택한 길은 '잘 해도 본전'인 험난한 길이다. 송 장관의 선택이 자리 욕심 때문이 아니라 공복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길 바랄 뿐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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