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수치의 함정, 낙제의 프레임

사진문화부장
[사진=문화부장]

한국관광공사가 2024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사상 처음으로 ‘아주미흡(E)’ 등급을 받았다. '관광 한류'를 앞세워 K-콘텐츠와 연계하고, 지역과 지속 가능성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려던 변화 노력은 단 한 글자의 성적표로 전면 부정당했다.

'E', 이 한 글자의 성적표로 기관의 공과를 단죄할 수 있을까. 숫자라는 허울 뒤에 감춰진 제도적 허점과 정치적 무관심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핵심은 ‘계량지표 급락’이다. 공사는 정성평가가 양호했음에도 재무 성과, 생산성 등 일부 수치가 기준에 미달했다는 이유로 전체 등급이 낙제 처리됐다.

주요 감점 사유는 ‘사장 장기 공석’이었다. 서영충 직무대행이 사실상 ‘사장’ 역할을 수행해왔고, 전략 수립과 대외 협력까지 진두지휘해온 점을 철저히 외면한 결과다.

안정적인 조직 운영을 인정받기는커녕 ‘대행’이라는 명칭 하나로 감점을 준 것은 본질보다 외형을 중시한 행정 편의주의의 민낯이다. 정치권 인사 교체를 둘러싼 눈치 보기로 공석이 길어진 책임을 조직에 전가한 것이다.

출국납부금 수입 감소를 공사의 실적 악화로 연결한 것 또한 심각한 오류다.

출국납부금은 출국자 1인당 1만원씩 자동 부과되는 공적 기금이다. 팬데믹 여파와 항공 노선 회복 지연, 정부의 인하 대책 등으로 인한 수입 감소를 공사 책임으로 돌린 것은 지표 해석의 왜곡이다. 

결국 이 모든 평가는 관광산업에 대한 정책 당국의 구조적 무관심을 방증한다.

관광은 숙박·교통·콘텐츠·일자리·지역경제를 아우르는 종합산업이자 국가 이미지와 직결되는 전략 산업이다. 그럼에도 정부 정책 전략 테이블에서 관광은 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번 평가는 그 인식의 연장선이었다. 산업의 특수성과 현장 맥락은 배제된 채 몇몇 수치로 1년간에 대한 성과를 재단했다. ‘실패자’라는 낙인이 묵묵히 일해온 실무자들에게 씌워졌다. 조직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실무자들 사이엔 허탈감이 퍼졌다.

정작 낙제점을 받아야 할 대상은 현실을 보지 못한 낡은 제도와 이를 방치한 평가 시스템이다. 

이런 프레임은 대외 신뢰도에도 타격을 준다. ‘낙제 기관’이라는 낙인은 글로벌 협력에서도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 관광 브랜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외생 변수와 산업 특수성을 무시한 채 정량지표만으로 기관을 줄 세우는 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정량과 정성, 현재와 미래가 함께 반영되는 다층적이고 유연한 평가 체계가 필요하다. 수치 뒤에 숨어 있는 실질적 성과와 맥락을 읽어야 하고, 탁상행정이 아니라 현장 실사를 바탕으로 한 진단이 이뤄져야 한다.

​​​제도는 현장을 바라봐야 하고, 평가는 성과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조직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산업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숫자에 갇혀서는 ‘사람의 산업’, 관광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평가를 위한 평가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진단이다. 산업의 본질에 대한 이해, 조직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인정, 그리고 미래를 위한 실효성 있는 피드백이 담겨야 한다.

관광은 지역의 숨결인 동시에 국가의 얼굴이다. 우리는 이 산업을 통해 세계를 만나고, 세계는 이 산업을 통해 우리를 본다. 더 늦기 전에 산업에 걸맞은 평가 틀을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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