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재우 경희대학교 교수]
지난 9월 11일 이재명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았지만 사상 처음으로 내건 '실용 외교'의 기치는 아직 뚜렷하게 나부끼지 않는 듯하다. 대통령의 미국과 일본 방문, 정부 대표단의 대미 관세 협상과 대중 행사 참석 등 다양한 행보가 있었음에도 성과는 가시적이지 않다. 이는 실용 외교를 단순히 '이념을 넘어선 유연한 대등' 정도로 이해한 결과일지 모른다.
실용 외교의 성패는 결국 결과로 판가름 난다. 그래서 지금의 평가는 다소 이르다고 할 수 있다. 미국 관세와 투자 협상은 진행 중이고, 일본과의 현안도 본격 협의 이전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용주의 성과란 단순한 최종 결과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제 해결 과정과 진척 수준도 중요한 평가 요소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공개한다기보다 성과를 자화자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 결과 국민은 실용 외교를 '깜깜이 외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실용 외교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 요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정치학에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정치적 이념: 개론서'(앤드루 헤이우드 저)에서 실용주의를 아래와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의한다.
다시 말해 우리 외교가 실용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면 우리가 처한 실제적 상황과 우리 외교 행위의 목적을 사전에 명확히 파악했어야 한다. 정부는 간단하게 생각하다 못해 국익 중심 외교를 실용 외교로 포장하려 한다. 국익은 엄연한 목표다. 실제적 상황과 목적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국익을 정의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현재 우리나라와 우리 외교가 처한 상황조차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점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협상에는 목표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에서 특히 목적이 분명할 리 만무하다. 실용 외교를 펼치기가 어려운 이유다.
이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을 방문했다. 특사단도 중국에 보냈다.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 열병식에도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의 방미 이전에 무역 협상단도 수없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외교가 분주해 보였으나 정작 국민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결과물은 없었다. 진척 상황에 대해서도 국민은 알 도리가 없다. ‘협상 중’이라는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는 무시됐다. 그러면서도 ‘잘 진행되고 있다’ ‘우리 국익 중심’으로 대응 중이라는 식으로 정부는 일관한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유익하지 않은 합의서에 서명할 필요가 없다며 대미 관세 협상에 대한 국민의 무결과 의구심을 일축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대통령의 미국 귀국 후 우리 국민 300명 이상이 비자 문제로 미국에서 쇠사슬에 묶여 구금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대통령의 언사 어디에서도 '실용 외교'의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용 외교 전략이 부재한 상황에서 실용 외교가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방미 목적의식은 뚜렷하지 않았고, 오히려 해외 정상들이 그곳에서 겼었던 수모와 굴욕을 피하는 데만 집중한 듯 보였다. 3500억 달러의 대규모 투자 약속을 들고 간 상황에서 비즈니스맨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이 모욕을 줄 이유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실의 평가 역시 이를 방증한다. 회담에서 모욕 대신 환대의 장면이 연출됐다는 이유만으로 '성공'으로 자평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통령이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공개한 것 또한 성과로 내세웠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장면과 발언을 '실용 외교'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실용 외교는 실질 상황에 대한 명확한 파악과 분명한 목적 설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리 측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국 정책 노선 전환조차 감지하지 못한 듯하다. 예컨대 7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은 SNS를 통해 중국 방문 의사를 밝혔다. 조건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초청장이었다. 그러나 정부는이 같은 신호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후 한 달 후인 8월 26일, 우리 대통령 과의 회담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연말이나 내년 초’ 방중을 언급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보다 구체적인 대중 관계 개선 의지도 드러냈다. 기자단에 그는 방중 계획뿐 아니라 중국 유학생 60만명에 대한 비자 발급 재개도 알렸다. 또 ‘더 이상 중국에 (압박) 카드를 쓰지 않겠다. 중국이 너무 많이 다쳤다’며 관세 전쟁이 일단락될 것임을 시사했다. 전례에 비춰봐도 중국과의 무역전쟁은 곧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1기(2017~2021년)에도 2018년 1년 동안 중국과 관세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1년 가까이 협상을 벌인 끝에 2020년에 무역합의서를 도출했다. 지금도 과거의 전철을 밟는 듯한 모양새다. 다만 다른 점은 이번 관세전쟁은 단기전의 양상을 보인다. 미국은 장기적인 경제 불황을 겪고 있기 때문에 관세 ‘신경전’과 무역 협상을 동시에 벌이고 있다.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미·중 양국은 무역 협상을 3차례 가지면서 고관세 부여를 유예·지연하는 이유다. 중국의 무역대표단도 워싱턴을 8월 말에 방문했고, 이번 달 스페인에서 4차 협상이 예정돼 있다. 트럼프는 매번 협상 결과에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가 어처구니없는 고관세율을 중국에 매기지 않은 이유다.
이런 미·중 간의 상황을 우리 정부와 대통령은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이 미국의 대중국 견제 동참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하지 않았겠다. 게다가 그는 미국이 우리에게 가진 불만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검찰이 주한미군기지(오산 공군기지)를 압수 수색한 사건에 미국은 경악했다. 오산 공군기지는 엄연히 치외법권 지역이다. 미국으로서는 모욕적인 사건이었다. 한·미 동맹의 신뢰에도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에 대통령은 압수수색이 미군 시설이 아닌 한국 공군 시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미국 측에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우리 검찰 측에선 “기지 내 중앙방공통제소(MCRC)에 대한 압수수색은 한국 정찰 자산으로 수집된, 대한민국 군인이 관리하는 자료만을 대상으로 진행됐다”는 해명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현직 군인이라면 공동 운영 체계에서 이의 분리가 불가능한 게 정설인 점을 모두 안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최후 통수권자가 할 말은 아니다.
관세 협상 역시 마찬가지다. 협상 대응책 마련에 우리는 일본의 사례를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우리와 상황이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말이다. 다양한 사례를 참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보다 적게 투자한다, 적은 관세율을 적용받는다’는 말로 국민을 위로하려 했다. 우리의 산업구조, 대미 수출 구조, 우리의 경제구조는 물론 우리와 유사한 나라의 사례를 비교 분석조차 하지 않았다는 고해성사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대선 공약집과 실용 외교에서 시장 다변화를 외친다. 다른 나라 상황은 물론 이들의 대미, 그리고 우리와의 무역 관계도 모른 채 말이다.
미국과의 조선업 협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조선업은 이미 1970년대 말부터 문을 닫았다. 미국이 지금 조선업을 부흥시키려 해도 충족 요건도 못 갖춘다. 노동력과 기술자는 거의 없고, 철강과 알루미늄 등 중요 원자재는 수입에 의존하고, 조선소는 거의 다 폐쇄되었다. 그중 운영 중인 것도 함량 미달이다. 더욱이 미 군함의 건조와 수리 등의 전제조건은 미국과의 신뢰다. 무기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의 최우방 동맹국이지만 미군 군함 건조에 선뜻 나서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신 미 군함의 유지보수(MRO)에만 집중한다. 세계 3위의 조선 강국임에도 말이다. 일본은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겸손하게 능력의 한계라고 하지만 미국 내에서 경제적 실익이 없는 동시에 일본 내에서 미 군함의 완전한 건조 작업이 비현실적인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미 군함 유지보수와 건조 수주에 과도한 기대를 품고 있다. 주한미군기지를 80년 동안 운영해 왔음에도 미국이 자국 군사용품에 얼마나 민감하게 대응하는지를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미군 당국은 기지에 비치되는 가구 하나도 군의 허가를 받은 미국 내 전문생산업체에서 생산해 직접 공수해 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내의 조선업의 현실은 어떠한가. 단편적인 예로 일단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업 가운데 하나는 미국 현지에서 사업을 추진하려 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정부와 기업의 목적의식 부재이다. 분명한 전략 없이 막연한 기대에만 의존하는 태도로는 실용 외교는 물론 산업적 성과도 담보하기 어렵다.
외교의 최고 목표는 국익이 아니다. 국민의 보호, 안위와 행복이다. 그다음이 국익이다. 실용 외교의 최대 목표는 국민을 위해 유연하게 행동함이고 그 목적은 국민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국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지아주 구금 사태를 보면서 새 정부의 실용 외교에도 국민은 보이지 않는다. 사업을 하려면 사업 환경을 사전에 완성해야 한다. 이 점을 정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정부의 실용 외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헤이우드 작가의 말대로 원칙의 수립과 여론을 이끌 수 있는 비전과 목표, 목적의식의 확립이 필요하다. 우리 외교는 이러한 것이 없었다. 이런 작업은 실용 외교가 내디뎌야 할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웨슬리언대 정치학 학사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석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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