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빈국 한국에서 비철금속 1위 고려아연 만들어...최창걸 명예회장 일대기

  • IFC 차관으로 온산제련소 기틀

  • 공사비용 7000만→5000만 달러 단축 성과

  • 지속적인 연구개발·설비투자 승부수

  • 회장 취임 후 글로벌 사업 확대

  • 아연잔재 재활용 친환경 해결도

사진고려아연
故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사진=고려아연]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한꺼번에 큰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개혁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은 비철금속 제련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이자 고려아연을 세계 최고의 비철금속 기업으로 성장시킨 탁월한 경영인이란 게 재계의 공통된 평가다.

7일 재계에 따르면 최 명예회장은 1974년 고려아연을 창립한 이래 부친의 기업가 정신을 이어받아 고려아연을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자원 빈국인 한국에서 비철제련업을 최초로 시작하여 불과 30여년만에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세계 제련소들을 추월하며 세계 제일의 종합 비철회사로 성장시키는 성과를 냈다.

최 명예회장은 1941년 황해도에서 고(故) 최기호 고려아연 창업주 겸 초대회장의 6남 3녀 중 차남(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60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학사를 거쳐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영원한 도전자...세계 최고의 아연제련소 목표

최 명예회장은 고려아연 설립을 준비할 당시부터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1973년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고, 당시 아연·연 광산 사업을 하던 영풍이 제련업종을 담당하는 회사로 선정됐다. 정부, 금융회사 등 여러 관계자들과 수없이 만나 협의한 끝에 1974년 8월 1일 단독 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됐다.
 
가장 큰 과제는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최 명예회장은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선 국민투자기금과 산업은행 등과 접촉했고 전 세계적으론 수소문을 통해  IFC(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 세계은행 산하 국제기구)를 알게 됐다. IFC는 사업자금으로 7000만불(한화로 약 700억)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최 명예회장은 5000만불에 해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후 턴키 방식 대신 직접 원자재 구매부터 제련소 건설까지 하는 방법을 택했고, 결국 IFC의 예상을 뒤엎고 4500만불로 공사를 마쳤다.
 
최 명예회장은 이어 대단위 제련소 건설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준비했다. 온산 비철단지 내에 제련소를 설립할 때부터 기술 수준과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의 제련소를 건설한다는 밑그림을 그리고, 대 단위 아연제련소 건설에 대한 경험이 일천했던 국내 현실을 고려해 기본계획과 프로세스 특허를 외국에서 도입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투자시에는 비용절감이나 효율성을 따지기보다 최신 기술과 미래 연관 사업과의 상호 보완 관계에 무게 중심을 두는 장기 전략을 채택했다. 

1978년 4월 공장을 설립했으나 시운전과 정상화에만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기술도 경험도 없었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최 명예회장은 이 기간 경영관리체계를 정비하며 온산제련소가 빠르게 정상가동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비철금속 회사를 만드는 것을 꿈꾸고 제련소를 건설했던 것처럼 최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설비투자로 이어졌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사장·부회장으로 재임하며 고려아연 기술연구소 설립과 생산시설 확장에 힘을 쏟았다. 아연·연·동제련 통합공정과 DRS공법의 연제련공장을 착공하면서 아연괴 런던금속거래소(LME) 등록으로 경쟁력을 강화했다. 또 1990년 기업공개를 추진해 투명경영 실현과 국민적 기업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1983년 영풍정밀 △1984년 서린상사 △1987년 코리아니켈 등 계열사를 만들며 그룹의 기반을 확대하고 사업간 시너지 효과를 꾀했다.

◆세계 제련업계의 거인...정도경영(定道經營) 강조

최 명예회장은 1992년 3월 고려아연 회장 자리에 올랐다. 회장 취임 이후에도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하지 말고 기본에 충실하자"는 신조에 맞춰 고려아연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다. 아연 공장과 연 제련 공장을 계속 증설했고, 호주에 아연제련소 SMC를 설립하며 글로벌 사업기반을 확대했다.
 
최 명예회장은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필요할 경우 과감한 투자와 모험, 끈질긴 노력 등으로 반드시 결과를 이끌어내는 승부사 기질을 가진 경영인이었다. 비철금속 세계1위를 견인한 퓨머와 DRS공법, 친환경 제련소의 모범이 되고 있는 호주 SMC 등은 이런 최 명예회장의 뚝심의 결과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투자와 모험정신, 선도적인 연구개발은 고려아연만의 독특한 기업가 정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최 명예회장은 제련을 공해 산업 대신 친환경 사업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꾸준히 펼쳤다. 우선 아연 잔재를 환경 친화적인 청정슬래그 형태로 만들어 시멘트 원료로 판매하는 등 아연잔재 재처리 기술을 상용화했다. 이 기술로 고려아연은 전세계 아연 제련소들의 공통적인 고민이었던 아연잔재를 친환경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02년 명예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지속해서 회사의 기술 개발과 경영 판단에 도움을 주었다. 환경친화기술 등 첨단 신기술개발에 매진함과 동시에 해외 자원개발과 희소금속 및 도시광산사업 등 미래성장동력 확보와 자원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원 리싸이클링 전담 부서를 신설해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산업용 자동차용 폐배터리, 폐PCB, 아연재 등을 적극적으로 수거해 원료로 사용했고 유가금속을 다시 회수함으로써 폐기물의 무분별한 처리를 막았다. 고려아연이 연간 100만 톤이 넘는 각종 광석과 재생물질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회수하는 금, 은, 인듐, 안티모니 등의 희소금속들은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며 회사의 수익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 개발 결과 창업 초기와 비교해 보면 아연 생산 능력은 13배,  매출액은 1000배 가량 늘어났다. 시가총액도 최대 20조원에 육박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뤘다. 선대의 창업 터전 위에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아연의 제2의 도약을 이끌었다.
 
이제중 고려아연 부회장은 최 명예회장에 대해 "명예회장은 고려아연을 특정 누군가의 회사가 아닌 임직원 모두의 회사라고 생각했다"며 "같이 일하는 직원들을 동료를 넘어 가족과 같이 여겼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최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은 고려아연 노사문화가 자리잡는 데 일조했다.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구성원 모두가 일구고, 그 성과를 함께 나누는 상생의 노사관계가 뿌리 내린 것이다. 이는 38년 무분규와 102분기 연속 흑자라는 대기록의 원동력이 됐고, IMF와 금융위기 등 국가와 기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임직원들에게 고통을 주는 구조조정·명예퇴직을 하지 않는 밑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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