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10/07/20241007085513492320.jpg)
[이두수 작가]
노동에서 행위로
이제 일용직 건설노동자는 단순히 생업을 위한 품팔이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한 노동자, 더 나아가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사상과 교양이 필요하다. 노동이란 단지 땀 흘리고 노동한 대가로 돈을 벌어 생존을 도모하는 사회적 수단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사회와 관계를 맺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받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식이자 사회적 매개이다. 아렌트가 말한 ‘행위(action)’는 바로 이 점을 보여준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현실 속에서 드러내고, 사회와 소통하며,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순간, 그 노동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 행위의 단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노동이 행위로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노동자의 자기 표현력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드는 일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부르디외가 강조한 아비투스의 변화, 즉 개인의 습관과 태도, 가치관이 구조 속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때, 노동자는 더 이상 타인의 지시에만 따라 움직이는 부속품이 아니게 된다. 그는 자기의 세계를 가진 주체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다. 2차 대전 후 만주의 허강(鶴崗) 지역에 남아 있던 일본인 탄광 노동자들은 전쟁이나 군사적 목적이 아닌, 평화적 산업이나 민간 경제 재건을 위한 일에 계속 종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유용(留用)’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러한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잡지 <쓰루오카>를 만들어냈다. 잡지 안에는 노동자들이 직접 쓴 시, 그림, 소설, 목판화, 번역문 등이 실려 있었다. 석탄을 캐고 땀을 흘리던 노동자들이 퇴근 후 글을 쓰고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들의 잡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노동자의 사상과 교양이 살아 숨쉬는 장(場)이었으며, 이런 행위는 아비투스적 습관과 태도가 문화적·사상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건설 현장은 어떤가. 여전히 ‘빨리빨리’와 ‘효율’의 논리 속에서 노동은 소모품 취급을 받으며 많은 사망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안전이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 되며 법과 제도적 개선과 함께 사회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안전문화와 의식의 개선은 제도와 인프라 개선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자 스스로가 생각하고 표현하며, 자기 행동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뿌리내릴 수 있다. 이것이 허강의 작은 잡지 한 권이 우리에게 여전히 말을 걸고 있는 이유다.
현장 내 문화공간과 문화활동
휴게시설, 작은 전시 공간, 소모임 장소 등을 조성하여 노동자들이 시, 그림, 글쓰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눌 기회를 제공하면 어떨까. 공간이 있어야 표현도 활성화된다. 그리고 현장 내에서 문화 워크숍(글쓰기, 미술 등), 공연, 작품 발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노동자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동료와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는 작업장 내 노동자들의 의견 개진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차별이나 비난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자기 표현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 문화도 필요하다. 물론 이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회사와 현장 리더들이 노동자들의 문화 활동 참여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요즘은 디지털 시대인 만큼 SNS를 비롯한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노동자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공유하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자기 표현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노동자의 내면적 성장과 의식 변화를 촉진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현장 문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의식 개선과 문화적 변화를 위한 핵심적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단순 노동을 넘어선 인간적 자존감
허강의 일본인 노동자들에게 잡지 <쓰루오카>를 만드는 행위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취미 활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패전으로 모든 것을 잃고 이국의 땅에서 강제적인 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그들에게, 글과 그림을 창작하는 일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이들은 기술자이자 노동자였지만, 자신을 단순히 석탄을 캐는 기계적 존재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과 별개로 내면의 정신적, 감성적 세계를 표현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 한 것이다. 이는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 육체적 작업을 넘어 내면의 자아까지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정성'(혹은 최선)의 극한적 발현이라 볼 수 있다. '정성'은 물질적인 결과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는 창작 활동이야말로, 외부 환경이 어떻든 스스로에게 충실하려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만들기'의 가치를 잃지 않은 것이다.
위 사례는 지금도 노동자에게 인문학 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들은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시와 그림, 소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성찰하고 타인과 소통했다. 기술적 숙련도를 넘어선 진정한 전문가의 모습은 육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인문학적 깊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의 100년이 지났지만 작업환경은 그때보다 훨씬 더 나아진 지금이지만,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의 책을 낸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진보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우리를 문화적으로 진보시키지 못했나
'빨리빨리'를 통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우리 사회는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이는 현장에서 노동자를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닌 '단가를 낮추고 속도를 높이는 도구'로 여기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적인 교류나 자기 성찰의 시간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이러한 문화 속에서 노동자의 내면은 돌봄을 받지 못했다.
만주 허강의 일본인 노동자들은 비록 강제적인 상황이었지만, 같은 고통을 겪는 운명 공동체였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책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현대의 건설현장은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개개인이 뿔뿔이 흩어져 일용직(하루벌이)으로 일한다. 서로가 경쟁자이거나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고립감은 함께 소통하고 문화를 만들어갈 여유를 앗아갔다.
오늘날 건설 노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작업물이 완성되는 전체 과정을 직접 볼 수 없다. 쪼개진 공정 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이 전체 건축물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 작업’이라는 자부심이 약해지고, 노동은 점차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진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는 정신적 성장에 큰 장애가 된다.
결국 현장의 물리적 환경은 진보했으나, 노동자의 삶을 둘러싼 심리적, 사회적 환경은 오히려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성장'이라는 단일 목표를 위해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희생한 결과,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얻었지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인간다움'은 오히려 잃어버린 것이다.
노동자는 안전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여야 한다
요즘 건설현장에는 의외로 교육도 많다. 매주 공정별 위험성 평가회의가 열리고, 이제는 휴대폰에 안전관리 앱까지 깔아야 출근이 인정된다. 최근 내가 설치한 ‘안전지킴이’라는 앱도 마찬가지다. 매일 아침 로그인해 확인 버튼을 눌러야 근태가 체크된다.
문제는 이 앱의 구조다. 위험요인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현장 노동자이건만, 그들이 직접 위험을 적고 보고할 수 있는 게시판은 없다. 대신 위에서 내려오는 메시지를 읽고 확인만 해야 한다.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는 또다시 교육의 대상, 관리의 대상, 통제의 대상으로만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마주하는 건 늘 노동자 자신이다. 자재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소리, 발 밑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진동,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불안한 동작, 이런 징후는 관리자보다 노동자가 훨씬 더 먼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말할 통로는 차단돼 있다.
해외 사례를 보면 차이가 뚜렷하다. 일본의 건설현장에서는 ‘위험예지(KY) 활동’을 통해 작업자가 직접 위험요인을 적고 공유한다. 유럽의 일부 현장에서는 노동자가 익명으로 위험을 제보할 수 있는 모바일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노동자가 안전을 말할 수 있는 구조’가 안전문화의 출발점이다.
우리의 현실은 아직 거기까지 오지 못했다. 위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하는 구조다. 안전은 결국 현장에 있는 노동자의 언어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노동자에게도 안전을 말할 권리, 자기표현의 기회를 열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안전문화의 첫걸음이다.
진짜 ‘여유 없음’은 시간의 부족보다는, 자기 내면을 돌아보는 행위의 우선순위와 사회적 인정 부족, 그리고 빠르게 바뀌는 정보/오락 문화환경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한 시간배분이 아니라, 조직과 사회가 ‘자기 표현’과 ‘내면 성찰’을 중시하고 그 가치를 북돋우는 노력이 함께 뒤따라야 더 풍요로운 노동문화, 안전문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idoosoo@naver.com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에서 빈곤지역 교육지원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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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unewsdsl**** 2025-10-10 11:33:15웹디자인님, 문장의 단락구분을 해 주시면 가독성이 좋아질 거 같아요. 그리고 그림을 맨 위로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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